1970년대 한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전통적 가치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뿌리 깊은 사상은 남존여비였다. 아들이 있어야 집안이 완성된다는 유교적 사고방식은 가족 구성원의 가치를 성별로 판단했고, 딸만 있는 가정을 대놓고 하찮게 여겼다.
나의 가족도 그런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딸만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웃의 조롱과 안타까움 섞인 시선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자격지심을 가졌고,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지 못했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 무게는 집안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딸이어서 좋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당당하려 애쓰셨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들이 없으니 딸들에게 기대는구나", "딸들이 효녀 노릇 좀 해야겠네" 하는 식의 말들로 우리 가족에게 상처와 부담을 주었다. 어머니의 자긍심은 늘 외부의 시선과 싸워야 했고, 그 상처를 가릴 무기는 오직 '딸들의 성공'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완벽해야 했다.
나는 어머니의 자랑이자 방패였다. 잘해야 했고, 실수해선 안 되었다.
작은 실패조차 "역시 딸은 안 되는구나"라는 사회의 말에 힘을 실어줄까 두려웠다.
가족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았고, 나의 성공으로 “열아들 안부럽다”는 어머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늘 긴장감 속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특별히 엄격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느낀 정신적 압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잘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기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시대였다.
사회는 여성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어머니로 보았고, 가정 안에서조차 존재는 인정받지 못한 채,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증명하려 노력했다.
나의 노력과 아픔은 한 가정의 비극이 아닌, 시대 전체가 만들어낸 구조적 억압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런 시대를 지나왔다고들 말하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누구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조금 모나고 어설퍼도, 가끔 멈춰 서고 주저앉아도, 그건 실패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고 있는 증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