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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by 구르미


“나르시시스트에게 길러진 사람은 자존감의 왜곡이나 감정에 대한 혼란과 관계 또는 자기 인식의 결핍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게 뭐죠?

상담 선생님께 여쭈었다.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란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필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용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기 모습을 사랑한 나르키소스(Narcissus)라는 인물에서 유래되었으며, 심리학에서는 자기애성 인격 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NPD)라는 진단명으로 분류됩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대해서 들어보긴 했지만 질병과 관련이 있는지, 어떻게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지난 일들이 모두 이해되기 시작했다.

엄마도, 남편도 내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그들은 한 번도 내 마음을 들여다 봐 준 적 없고 두 사람과 함께 살던 2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벌거벗은 듯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글은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진심과 기억, 세계관이 조각나는 듯한 일이었고, 내 안의 가장 은밀한 방을 열어 타인 앞에 내어놓는 것 같아 불안했다.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분노할 것이고, 나는 어떤 고통을 받을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내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들을 욕되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결국 '앙천이타'와 같은 격이라 더욱 내키지 않았다. 이처럼 정체성도 상실한 채 칼날 위를 걷고 있는 인생이 가여웠고, 또 이런 나를 누군가 가 불쌍히 여길까 봐 더더욱 망설여졌다. 그렇게 세월은 또 수년이 흐르고 내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채 점점 더 어두운 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들을 이해해야 했고, 사실을 확인해야 했으며, 증거를 남길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 대비하고 방어하고 치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불편함과 두려움을 감수하고, 결국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심리학에 대해 공부했다.

그들의 특징을 따라가다 보니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엔 자료도 많이 부족하고 알 수 있는 방법도 많지 않았지만 관련 자료들을 찾는 과정에서 알고리즘을 타고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자료와 정보들이 모두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엄마와, 같은 증상을 가진 남편과 살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특징 중 공통적인 것과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을 찾아보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자존감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로 여기며,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존감은 종종 과장되거나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면에는 깊은 불안과 공허함이 자리하고, 결국 과도한 자존감은 ‘진짜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불안정한 자아를 감추고 보상하기 위한 가면에 가깝다.


2.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 부족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필요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다. 대체로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가 자신을 공감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그들이 공감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3. 과도한 인정과 칭찬, 타인에 대한 비판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과도한 인정과 칭찬을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타인을 질타하거나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


4. 비판에 대한 과민 반응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거절은 견디지 못하고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5. 관계에서의 문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조종하거나 착취하려 하므로 주변 사람들과 일반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나르시시스트의 이러한 특성들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일상에서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의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들의 특징에 대해 알았으면 이제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파악을 해야 했다.

나르시시스트(자기애성 인격장애자) 부모나 보호자 아래에서 성장한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 욕구,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거나 조종당하는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한다.


1. 자존감의 왜곡

(1) 낮은 자존감

늘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준은 계속 바뀌었고, 결국 "나는 안돼"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등 낮은 자존감으로 힘든 성장기를 보낸다.

(2) 과도한 자기비판

늘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하거나 비난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작은 실수 하나에도 스스로를 심하게 책망하며,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3) 타인의 인정 추구

자신감이 결여되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떳떳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믿지 못해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에 의존한다.


2. 감정 억제 또는 혼란

(1)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모름

'기쁘다, 슬프다, 화가 난다'는 기본 감정조차 혼란스러워하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2) 심각한 죄책감

잘못을 하지 않고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다가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기적인 행동처럼 느껴진다.

(3) 분노에 대한 억압

화를 내면 벌을 받거나 무시당했던 경험 때문에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내면에 쌓아 두었다가 더 큰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3. 관계에서의 왜곡

(1) 타인을 만족시키는 데 익숙함

항상 타인의 기분을 먼저 살피며, 자신의 욕구를 억누른다.

(2) 건강하지 않은 관계 반복

자신을 억압하거나 조종하는 사람에게 끌리기 쉬움. 익숙한 고통에 무의식적으로 끌린다.

(3) 경계 설정이 어려움

'거절'을 두려워하고,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혼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 불가능한 일까지 도맡아 해 내느라 힘겨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인정받기는커녕 약속하고 해내지 못한 결과에 대한 지탄을 받으며 억울해한다.

(4) 고독함

보통의 가정과 다른 환경이므로 주변인 누구에게도 공감. 이해받지 못하고 홀로 모든 짐을 떠안고 살아간다.


4. 자기 인식의 결핍

(1) 자신이 누구인지 모름

부모의 기준에 맞춰 살아왔기에, 자신의 욕구나 가치관을 구별하기 어렵다.

(2) 무기력과 우울감

자신이 삶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느낌, 공허함을 자주 느낀다.

(3) 만족하지 못함

부모의 칭찬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습관이 남아 성취 후에도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안함을 느낀다.


5. 과잉 책임감 또는 극단적 무책임

(1) 모든 일이 내 탓처럼 느껴짐

부모가 감정을 자식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나?”라는 자동 반응을 가진다

(2) 회피 성향

감정적으로 짓눌린 성장 경험으로 인해 책임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도망치기 위하여 회피해 버린다





글을 쓰는데 눈물이 났다.

내 나이 50이 되어서야 슬플 때 울고, 분하면 화를 내고, 억울하면 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 이맘때 암수술을 받고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큰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따지기도 하고 소심하게 화도 내었는데, 어색했지만 시원했다.

하지만 아직도 본능적으로 감정을 숨기고 표현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것은 나도 모르게 움츠려드는 본능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이며 괜찮은 척하는 내 자존심의 일부였다.



회복을 위한 시작


우선 ‘내 감정은 중요하다’는 인식부터 가져야 했다.

심리상담과 치료를 통해 왜곡된 감정 체계를 바로잡고 자아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했고, 거절하기와 내 감정을 표현하는 등 경계 세우기 연습을 하였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 이상하거나 틀린 것이 아님을 알게 되도록 해야 하지만 아직 주변에 비슷한 경험자를 찾지는 못하였다.


다음은 심리상담과 치료에 대한 내용들이다.


나는 오래된 불면증과 수면부족 후유증으로 잦은 두근거림과 두통이 극심해 병원을 찾았다.

아니다, 그때도 뭐 이런 일로 치료까지 받아야 되나? 생각하며 참아오다가 정서불안으로 고통받는 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함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상담자는 제일 먼저 지금의 가정환경과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바르고 예쁘게 잘 키웠다며 항상 칭찬을 들으셨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어요."

울컥 목이 메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사랑받기 위해 사력을 다해 살았나 봐요. “

"계속해 보세요."

상담자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매우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늘 어머니 지시대로 행동해야 했고 어머니가 가르치는 대로 생각해야 했고 어머니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해 혼나야 했어요. 미술을 좋아했던 나는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고도 공부를 게을리하고 그림만 그린다고 혼날까 봐 숨겨야 했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에 '작가는 아무나 하니?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며 화를 내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몰래몰래 일기 쓰는 일로 만족해야 했지요."


상담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쟤는 머리가 나빠서 남들보다 두 배 노력을 해!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저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것 같았어요."


정말 그랬다.

누군가를 때리면 잘못했다고 혼났고, 맞으면 바보같이 왜 맞느냐고 혼났다.

늦게 까지 공부를 하면 전기세 아껴야 한다며 혼을 냈고, 불을 끄고 일찍 누우면 왜 공부는 안 하냐고 화를 냈다.

엄마의 웃는 모습은 남을 향해 웃을 때뿐이었고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신세 한탄을 자주 하셨다.


"최근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너도 그림이나 계속 그리지 그랬니?'라고... 저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대꾸하면 '내가 언제 그랬니?'라고 화를 낼 것 같아서..."


상담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의 가슴속 깊은 이야기를 모두 꺼내 보이라는 무언의 허락이었던 것 같다.

평소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의 과거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면서 일어났던 일, 느꼈던 일, 하고 싶었던 일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간암으로 투병 중이셨고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그때 나는 무서웠어요. 어머니마저 잘 못 될까 봐...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고 아직 학생이었던 두 동생들과 어머니를 위해 가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미술을 포기하고 공기업에 입사해 10여 년을 근무했고 어머니 명의의 집을 사 드리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어요. 내가 힘들거나 아프면 엄마는 나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아파할까 봐 힘들어도 괜찮은 척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지만, 그 무엇도 보상받고 싶지 않았고, 억울하지 않았고, 내게는 그 일이 당연했고 뿌듯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고생했다. 수고했다. 장하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내 능력밖의 더 큰 것들을 바랐으며,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나보다 부족한 나를 탓하자 어느 순간 서운함이 밀려왔어요.


내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던 상담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는 심리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욕구와 기대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자녀의 독립적인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이는 자녀의 자존감, 자아 인식, 대인 관계 등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그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지금까지 그토록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을 해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 피나는 노력으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고, 너무너무 힘든데 나는 그들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맞아요. 끊임없이 효도를 해도 나는 효녀가 될 수 없었고,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노력했지만 어머니를 단 한 번도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성인군자를 모셔와도 그들의 단점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라니...


상담의 효과는 컸다.

내가 그들을 알기 전과 알고 나서의 대처법은 분명 달라지고 있었고 아직도 나는 엄마와 남편이 힘들고 불편하지만 '내가 그들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가 늘 잘못했을 거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분명 우리 엄마도 모성애가 없지는 않다.

자식들을 위해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당신이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 당신은 만족을 모르는 병을 갖고 있대요.

"이제 우리 사소하지만 좋은 일에 감사하고 좋은 생각만 하면서,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하면 안 될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껏 쌓여온 묵은 감정을 덜어내고 싶었다.

나도 힘들었다고, 왜 그랬냐고 투정도 부려보고, 싸워도 보고, 울어도 보고, 화해하며 안아도 보고 싶은데... 이제는 참는 것만 하지 않고 지혜롭게 잘 대처할 수 있는데...


그럴 기회조차도 주지 않고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또 혼자 울음을 삼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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