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부터 나였다.
언제부터 나를 자각하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내 것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어도 되는지, 내가 원하는 옷을 입어도 되는지, 원하는 일을 누군가의 허락 없이 해도 되는지조차 몰랐던 나.
나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내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는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게 길러져 왔고, 그렇게 순종하는 삶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다툼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회피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습관처럼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의견이 충돌할 때는 굳이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의견이 다를 때는 언제나 상대방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더 편했고, 여전히 누군가의 말과 시선에 맞춰 사는 데 익숙했다. 선택보다는 순응이, 주장보다는 침묵이 편하다고 믿었다. 다툼이 두려웠고, 갈등보다는 늘 조용한 평화를 선택했다.
순종하며 길들여진 삶은 나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는 어떠한 욕구도, 어떠한 욕심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원래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아이였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달리기를 좋아했고,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행복해 하던 활동적인 아이였다. 노래를 지어 부르고, 이야기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나는 미술 활동을 가장 좋아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반항하며 가까스로 미대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간암 발병 소식을 듣고 결국 휴학을 결정해야 했다.
그 후 부모님의 권유로 공기업에 취직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다시는 미술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가장이 되어야 했고,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졌다. 그렇게 내 청춘의 열정은 빛을 잃은 채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삶은 반복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생활 속에서 ‘그림’은 점점 더 머나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내가 좋아하던 색깔과 선, 형태와 감정, 감각, 그리고 열정까지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꿈이 사라진 내 삶은 행복하지 않았고, 쉼 없이 달려온 세월은 나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때로는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며,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마저 들게 했다.
한국 사회에서 장남과 장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 내 서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당시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가부장적 가족 구조와 유교적 가치관이 여전히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장남과 장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부모의 뜻을 따르며, 동생들의 미래를 떠맡아야 하는 무거운 역할과 책임을 짊어졌다.
장남은 대를 잇는 존재로서의 책임, 즉 유교적 전통 아래 놓인 운명이었다.
장남은 "집안의 기둥"으로 여겨졌으며, 조상 제사를 이어가는 존재로서 가문의 명예와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부모의 부양은 물론이고, 형제자매들의 진학과 결혼에까지 관여해야 했고, 가족 전체의 운명을 짊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과 진로에서는 우선순위인 경우가 많았지만 반드시 성공해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혼과 가정의 이중부담으로 결혼할 때 부모를 모시는 조건이 거의 당연시되었고, 결혼 후에도 부모와 조상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했으며, 명절이나 제사뿐 아니라 가계부담을 책임져야 했다. 옛날에는 집안의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는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제사에 대한 부담만 남은채 유산은 모든 형제자매가 동등한 비율로 상속받게 되었다.
법과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것이 아니다. 재산 상속도, 가사의 부담도, 가계일원이면 모두 동등한 혜택과 동등한 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장녀는 어머니를 대신한 존재였다.
특히 장남이 없거나 어린 경우,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대신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보조자로, 사회적으로는 동생들을 위한 후원자로 살아야 했다. 심지어 딸이라는 이유로 장남과 다르게 진학이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을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함께 가사노동과 육아, 농사일까지 도맡아야 했으며, 특히 학교에 다니면서도 집안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이기에 희생은 당연하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꿈이나 진로는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장녀는 종종 "참아야지, 양보해야지, 희생해야지"라는 말에 익숙하게 길들여졌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명목 하에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욕망을 숨기며 살았던 것이다.
장녀는 결혼 이후에도 친정의 문제에 가장 먼저 호출되었고, 동생들의 결혼 자금, 부모 병간호, 집안 갈등 해결에 계속해서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장남이 없는 가정에서 장남 역할을 대신한 케이스다.
늘 잘해야 했고 실수를 하면 안 되었고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했다.
1970~90년대의 한국은 고도성장기였고, 그 이면에는 이렇듯 맞이들의 희생이 따랐다. 농촌에서 도시로 대이동이 일어났고, 가족은 해체되거나 재편되었으며, 생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남·장녀는 가족의 '기둥'이자 '버팀목'으로 기능해야 했다. 국가의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던 시절, 노인 부양, 병원비, 학비 등 모든 부담이 개인과 가족에 전가되었으며, 그 부담을 가장 먼저 감당한 이들이 바로 장남과 장녀였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동생들보다 잘되면 미안했고, 못되면 부끄러움과 자책에 시달렸다.
장남·장녀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늦은 나이에 공허함이나 우울감, 번아웃을 경험하는 것도 이 시대 장남·장녀들에게 흔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효도라는 이름의 무조건적 헌신은 때로는 개인의 삶을 갉아먹었고,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옳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써왔지만,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