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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Apr 21. 2021

겸손, 그 하찮음에 대하여

패밀리 2

“안돼 오지 마!”

아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양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아장아장 달려오는 애기를 막아서며 “위험해!” 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하자 달려오던 애기는 그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아이는 겨우 5살이었고 달려오던 애기는 한 살가량 더 어려 보였다.

뒤 따라오던 애기 엄마가 내 아이를 나무랐다.

“왜 그래?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애기가 놀래잖아!”

내 아이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눈빛이 간절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며 우는 애기를 바라보며 사과를 했다.

“형아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엘리베이터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나 봐.”

그러자 애기 엄마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애 혼자도 아니고 내가 뒤따라 오고 있었는데 뭔 걱정이에요?”

누군가와 싸워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나는 싸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아이를 나무랐다.

“윤아 갑자기 소리 지르면 애기가 놀래잖아 앞으로 조심해!”

이 경우 보통 아이들은 억울해서 화를 내거나 소리치거나 따지거나 울거나 하기 마련인데 내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 또한 아이 편이 되어주지 못한 미안함보다 머릿속은 쓸데없는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애기가 엘리베이터로 달려와 빠질까 봐 우리 애가 막아준 거예요’라고 말을 해? 아니면 ‘나쁜 의미로 한 행동도 아닌데 왜 애한테 화를 내세요?’ 한마디 쏘아붙일까?

고민하던 사이 애기 엄마는 애기를 데리고 내렸고 나는 알 수 없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기 엄마가 내렸으니 어쩔 수 없이 싸우지 못했다’는 안도감?





같은 해 놀이터에서 생긴 일이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놀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앞에는 내 아이가 사탕을 손에 들고 여자아이 앞에 서 있었고 여자 애 엄마가 달려가며 우리 아이를 나무랐다.

“친구 사탕을 뺏으면 어떡해?”

나는 달려가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내 아이를 나무라며 손을 끌고 왔다.

한편으로는 우리 아이가 뺏기는 일은 다반사지만 뺏을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무조건 자기 아이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겸손을 내 세우며  

“너 친구 사탕 왜 빼앗았어?”하고 화를 냈다.

내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마 잘못했어요”라고만 했다.

그런 아이를 울고 있는 여자아이 앞에 데려가서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내 아이는 ‘미안해....’ 사과를 하고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음이 아팠지만 우는 아이를 달래며 내 아이 손을 잡고 돌아섰다.

“사탕은 왜 빼앗았어?” 묻자 아이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바닥에 있는 걸 주워주었어.”




갑자기 발이 얼어붙었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우리 아이가 빼앗은 게 아니고 바닥에 흘린 걸 주워 주었대요.”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은가?

상황 종료된 뒤 다시 변명하는 것이 구차하다고 생각한 나는 말없이 아이손을 잡고 돌아서 와 버렸다.


어쩌면 그날도 나는 혹시라도 싸우게 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와 싸워보질 못한 나는 어릴 때부터 ‘무조건 참아야 하는 법, 무조건 양보해야 하는 법, 무조건 먼저 사과해야 하는 법’을 배웠고, 겸손이 미덕이라 생각해 온 내 부모님은 내가 잘한 일도 나무랐고 잘못해도 나무랐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나를 혼냈기에 나 또한 내 부모님과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나를 두고 ‘착하다’고 말을 하면 ‘애가 어리숙한 게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라며 부끄러워하셨고,

“축하드려요. 아이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미술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들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부모님은 “그놈의 그림 그린다고 책은 쳐다도 안 봐요. 그러니 공부는 맨날 꼴찌지요.”

어린 나는 엄마에게 대들고 싶었다.

‘나 학교에서 공부 잘해요’

‘엄마는 왜 내가 10등을 하면 5등 안에도 못 든다고 혼내고, 5등을 하면 3등 안에 못 든다고 혼내고, 3등을 하면 1등 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얼마나 더 해야 엄마가 만족하나요?’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런 말 한마디 못해보고 엄마의 인형으로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았고 그렇게 살고도 단 한번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관성이 없는 엄마는 당신의 말 한마디에 사력을 다해 달려가는 나를 보며 수도 없이 비난하며 턴을 요구했다.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가면 좋겠다. 임춘애 같은 육상 선수가 되어라”

달리기 연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 “하루 종일 밖에서 뜀박질이나 하고 공부는 언제 하니?”

“아니 엄마가…”

말대꾸나 따박따박 하고 누가 보면 얼마나 버릇없다고 하겠니?”

공무원이 최고야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을 하든 초등학교 선생이 되든지 해라!”

“사범대가 얼마나 힘든데….”

“세상에 힘 안 드는 일이 어딨니? 다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거지 너희는 끝까지 하는 게 하나도 없니?”

결국 나는 공무원이 되어 10년을 근무했지만 수시로 엄마는 “누가 짜장면을 팔아 갑부가 되었단다. 너희도 장사나 하면 좋을 텐데….” 한 달도 안되어 “누가 컴퓨터로 큰돈을 벌었다는데 너희들은 저런 것도 할 줄 모르지?” “저런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리 잘난 자식을 두었는지…., 신랑복 없는 사람은 자식복도 없다더니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평생을 못 미더운 딸로 살아가고 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내 뒤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이 없었고, 내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대응할 줄 몰랐고 억울한 건 나인데 사과하고 반성하는 쪽도 내가 되어야 했고, 온 세상은 모두 내게 위험한 것들이었으나 나는 나를 지켜야 했기에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두려움과 아픔으로 얼룩진 상처투성이였고, 내 부모로부터 대물림되어 온 것들은 반복학습으로 아이들에게 실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아이는 잠꼬대를 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나는 그날 잠든 아이를 보며 한없이 울었고 ‘나는 엄마가 아니야.’, ‘나는 엄마가 아니야.’를 연신 되뇌며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같은 반 여자 아이에게 욕을 해서 우리 애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화를 내며 사과하라고 다그쳤는데 그때 아이가 울먹이며 내게 처음으로 말을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이라서 대들면 안 되고,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동생이라서 참아줘야 하고, 여자가 때리면 남자니까 참아야 하는데... 그럼 나는 평생 맞고만 살아?”

나는 순간 둔탁한 것에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양보하고 참으라던 내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웠는데 나 또한 아이에게 똑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 이후 나는 용기를 었고 아이를 위해 싸울 준비를 했다.

엄마, 아빠가 항상 든든한 힘이 되어  테니 참을  없을 만큼 화가   화를 내고 싸워도 된다고 가르쳤다.

쉽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 현실은 냉혹하고 거대한 두려움 그 자체다.

수도 없이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쏟아내기에 아직 나의 내공은 너무 힘이 약하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아이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한다.

좀처럼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매일 용기를 낸다.

적어도 내 아이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살지 않도록, 불합리한 일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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