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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Apr 19. 2021

오지랖이 부른 참사

넘치면 부족하느니만 못하다고 했던가?





‘친절과 배려’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행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부터 다른 노력에 취중 하는 중이다.

불필요한 친절에 대하여 좀 더 무관심하기 위해, 살짝 배척하기 위해...






나는 나에게 소홀한 대신 타인에게 넘치는 애정을 쏟았다.

나에게 소극적인 대신 타인에게 적극적이었다.

혼자일 땐 큰 문제가 안되었으나 내 가족을 나의 부산물로 착각한 나는 그들이 나처럼 남에게 관대하길 바랬고, 화가 나도 참길 바랬고, 그들이 고통을 받더라도 참으라고 강요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나는 끊임없이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내 부모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고 그렇게 커 왔기 때문에 그게 싫었음에도 잘못된 것인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가 진단을 내려 보려고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그때의 감정들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만 주며 살았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다.

오지랖이 불러온 결과인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 학교에 갔다가 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우산을 주려고 학교로 가는 중이었고 내가 태우는 바람에 아이와 엄마는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

아이가 없어져서 많이 놀라기도 했고 찾아다니며 애를 태우기도 했으며, 집에 와서 아이를 많이 꾸짖었다고도 했다.

지인의 말로는 내가 참 개념 없는 엄마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속상하고 미안했다.

아이를 위한 작은 배려가 그들을 힘들게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참 무모했다.

내 아이가 낯선 사람 차에 타거나 낯선 사람을 따라갔다면 분명 내 아이에게 화를 냈을 텐데 내 친절을 우선으로 생각한 탓에 타인의 상황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또한 그 아이에게 전화번호를 묻고 전화를 걸어 ‘비가 와서 아이를 내 차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는 중이니 걱정 말라’는 연락을 취했어야 했는데 짧은 거리였고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안일함 때문에 연락해야 한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뭐랄 것도 없어서 내 오지랖을 질책했다.



또 한 번은 타 지역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날 나는 기차를 타고 갔기에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으나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친구를 기다리며 그새를 못 참고 가락국수이나 한 그릇 먹어야겠다는 집념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고 무의식 중에 내 몸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에 끌리듯 가락국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쯤, 아기를 안은 할머니가 화장실이 급하니 아이를 안고 있어 달라고 부탁하며 다가왔다.

조금 고민을 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아기를 안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10분이 지난 것 같았는데 할머니는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때 아주머니 한분이 헐레벌떡 기차역 로비로 들어오더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화를 냈다.

아이가 없어져 찾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당황한 나는 횡설수설 말을 더듬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사람의 태도는 마치 나를 유괴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고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럽고 이유 없이 창피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맙다는 인사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할머니를 찾아서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야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나의 오지랖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만들었구나 싶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부탁했을 때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책했다. 그러나 사실 이번 사례는 부탁을 들어준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들었으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충분히 인지 했을 텐데 사과도, 감사인사도 하지 않고 가버린 아이 엄마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어 나가다 보면 기본적인 배려가 없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다고는 하지만 감사한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내 삶에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나름 커다란 사건이기도 했으며 현명한 선택, 지혜로운 배려가 필요한 때였다.

그 날부터 나는 남에게 좀 무관심해지기로 마음먹었고 잘 안됐지만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

오지랖도 병이라 했던가?

보통의 사람들은 배려하며 살자, 베풀며 살자, 도와가며 살자고 노력하는데 나는 반대로 살고 있으니 이것 또한 웃프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나는 아이(A) 생일에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때 다른 아이(B)의 생일이 우리 아이와 비슷해서 같이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다.

세 아이가 만나는 자리에 두 명이 생일이라 고민이 되었다.

나머지 한 아이(C)에게도 선물을 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나만 챙겨 주면 B의 엄마가 난처해질 것 같아서, C에겐 미안했지만 B의 생일 선물만 챙겨가기로 했다.

그런데 B는 A와 C의 선물을 모두 챙겨 와서 센스 있는 엄마가 되었다.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면 B의 엄마가 오히려 나에게 미안해질 것을 염려해 굳이 변명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 버렸고 나는 두고두고 C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B를 생각한 지나친 배려가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사례이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선물을 준비할 때 B와 연락하고 충분히 의논했다면 이런 난처한 상황은 없었을 텐데 이 또한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큰아이가 학교에서 필요한 자격증 시험을 치는데 데려다주고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와 친분이 두터운 학모 한 분을 만났고 너무 반가워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다.

그녀의 둘째 아이가 우리 큰 아이와 가까운 친구 사이라 유난히 정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보다 더 친한 사람들을 만났기에 나는 자리를 피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때 마침 내가 아는 지인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나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썩 동행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먼저 자리를 뜨지 않으면 그녀가 내게 미안해서 “차는 다음에 마셔요”라고 말하지 못할까 봐 먼저 선수 친 셈이다.

“저는 다른 분들과 차 한잔 하고 올 테니 저분들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더 친한 사람들이 오니 나를 배척하고 가는구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뒤 그녀의 행동이 냉랭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많은 고민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표현의 방법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저와는 다음에 가셔도 괜찮으니 저분들과 다녀오세요”라고 하던지, “저분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만나고 오세요. 저는 다른 분들과 함께 가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고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었다면 그런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표현의 중요함을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번 사례는 동생이 겪은 일인데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미안해하는 걸 보았다.

술에 약한 동생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가다가 길에 주저앉아 잠이 들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남자 친구 2명이 동생을 알아보고 양쪽에서 팔을 하나씩 붙잡고 부축해 주었는데 남자 두 명에게 붙잡혀 가는 여자를 보고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이내 경찰이 출동했고 그들은 경찰서로 갔단다.

“이 두 분을 아십니까?” 동생에게 경찰이 묻자 동생이 고개를 저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 남자 친구들은 보호소에 있어야 했던, 참으로 미안한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 행동들이 어째서 화가 되어 돌아오는가?라는 주제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누군가를 위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이 상처가 되고 순수한 선행이 오히려 화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돕지 말아야 하는가?

만약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방관도 죄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도와주란 말이야? 말란 말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인을 도울 것인가?


선행을 할 때도 지혜롭게 하자!

누군가가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도울 수 있어야 하고 원하지 않는 도움은 오히려 상대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생각이 깊어지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때로는 단순함이 약이 될 때도 있으며 ‘저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내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짐작만으로 일방적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 묻고 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한 다음 도움을 준다면 그 도움이 값지고 아름다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내 방식대로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 놓고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그는 고마워할 줄 모른다.’ 또는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에게 화를 내다니...’ 라며 서운해한다.

이제 선행을 베풀 때도 일방적인 도움보다는 진심으로 상대가 도움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핀 뒤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아낌없이 돕자!

일방적인 도움은 상대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저 오지랖 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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