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드릴 Aug 28. 2020

직박구리, 한 뼘의 하늘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푸르른 하늘뿐이다. 햇빛이 잘게 부서져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누워있는 고양이 아래로 늘어지는 거뭇한 그림자를 바라보면 비로소 아침이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내 침대 머리맡에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가 있다. 침대 위에서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공을 들이지 않아도 날씨를 파악할 수 있다. 구름이 잔뜩 꼈는지, 제법 산뜻한 날씨인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지.


 오늘은 코로나가 잠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맑았으므로 햇볕을 쬐다가 다시 잠에 들어버렸다. 잠결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창가에 앉은 고양이가 나를 골똘히 내려다보다가 꾸벅 조는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사실 꿈을 꿀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하늘 위로 둥둥 떠다니는 먼지, 참새 우는 소리,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들의 소리. 방 안에는 온통 온기가 감돌았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산들바람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었다.


 오후에는 연인과 함께 한강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나는 생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척박해 보이는 도시에 생각보다 풍요로운 생명의 일대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상 세계가 얼마나 신비로 가득한지 매번 놀라게 된다.


 한강 다리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는 잉어 떼를 바라보았다. 잉어의 등을 유심히 보았다. 등을 이루는 패턴이 저마다 달랐다. 평범한 격자무늬부터 시작해서 큰 반점이 대담하게 박혀 있는 놈도 있고, 지느러미 부분에서 척추가 기형으로 꺾여있어 헤엄치는 모양이 불편해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그 안쓰러운 움직임이 계속 눈길이 갔다.


 무엇을 먹으면서 살아가는지는 몰라도 물고기들은 제법 살집이 두둑했다. 심지어 웬만한 새보다도 덩치가 컸다. 한강 위를 떠다니는 새들은 녹색 강물 아래에서 헤엄치는 토실토실한 잉어 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 위를 자유로이 헤엄치다가 깃에 머리를 파묻으며 몸을 정돈하고 있었다. 문득 이 물고기들의 포식자는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아마 인간의 낚싯대에 걸리지만 않으면 대적할 자 없이 평생 장수할지도 모른다.


 좀 전에 보았던 척추가 꺾인 물고기는 이곳에 오래오래 살면서, 산신령만큼 나이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 한강의 물살을 벗 삼아 평생 동안 헤엄치다가 인간이 짐작하기 어려운 깊은 도를 쌓고 한강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호호 할머니가 되어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하늘 위에서 벼락이 번뜩 내리치면서 잉어가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한참 동안 한강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면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다가 능숙하게 물 밑으로 잠수하는 검은색 새들, 구름이 남긴 자취를 따라 활주로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기러기들 사이로 햇살이 눈부셨다. 눈살을 찌푸리며 갈대밭 사이로 걸어갔다.


 바람을 맞아 갈대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조용한 성당과 그럴듯하게 조성된 산책로 하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우연히 예상치 못한 경로로 낯선 산책로를 마주치는 날이면 나의 심장은 부드럽게 뛰고는 한다. 매화나무에서 나온 진한 향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인과 나는 붉은색 꽃이 무성히 개화한 동백나무를 함께 바라보다가 직박구리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직박구리의 눈이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무심코 직박구리의 부리가 동백 꽃잎 위에 미끄러질 때면 하늘은 나뭇잎 사이로 숨어버린다. 팔레트 위에 붓으로 대충 쓱쓱 칠한 것처럼 직박구리의 눈가에 난 연한 붉은색 털은 목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진해진다. 동백나무 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는 발놀림이 여간 재간이 넘치는 게 아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기 위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직박구리는 우리에게 관심도 없다. 인간을 길가의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하찮게 취급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늠름한 친구 같기도 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언제나 새의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자연은 무엇도 판단하지 않는다. 문명만이 우리를 꾸짖는다.


 한강 멀리서 바람이 외치는 부름에 갈대가 화답하는 소리가 귓가에 부딪혀 온다. 나는 낯선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저 먼 곳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바라본다. 몇몇 사람은 침묵에 잠긴 채로 벤치에 앉아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침묵의 빈틈 사이로 이름 모를 새가 운다.


 나는 직박구리의 눈길로 모든 것을 지켜본다. 서울의 건물들은 뿌리를 내린 채로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강물은 흐른다. 사람들은 걷는다. 계속해서 흐르는 강물을 따라,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은 계속해서 연결된다. 현재의 시간이 다리 밑에서 흐르는 강물의 물살과 함께 쓸려나가 버리고, 나는 비로소 몽상에서 깨어난다. 나는 어느새 갈대밭을 따라 걷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직박구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한강을 따라 걷는다. 연인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연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의 말대로다. 강물 위에서 은빛 연어 떼처럼 무리 지어 떠다니는 햇빛이 물살을 따라 헤엄치고 있다.


 나는 침묵을 지킨다. 옆에서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온기에 기대어. 그저 현재만이 전부인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너의 찡그린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