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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요커 Feb 12. 2021

EP5. 2014년, 취업하면 돈이 쌓일 줄 알았다.

뉴욕, 그리고 외국인

미국은 주급 혹은 bi-weekly라고 불리는 격주로 급여를 지급받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에서도, 그리고 여기서 졸업을 할 때도 미국 회사원들의 상대적 고액 연봉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런 삶을 솔직히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 회사에 입사를 할 때도, 첫 커리어 치고는 뉴욕 기준 최저 연봉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한국 대비 제법 쏠쏠한 금액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주급이 들어오면 그래도 학생 때와는 다르게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도 먹어보고 무언가 필요할 땐 구매를 할 수 있는 아주 조금의 숨통은 트였는데, 내가 과소비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모여지는 돈이 없었다. Pay stub이라는 급여 명세서를 받을 때마다 '뭐 이렇게 떼 가는 것이 많나'라는 생각은 했지만, 어설픈 연봉으로는 미국에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2014년 초반에 세금 정산을 위한 W2라는 지난 한해간 소득에 대한 정산표를 받고 나서였다. 

6월 3일부터 회사 생활을 시작했었기에 연봉의 반 이상은 고스란히 들어온다고 생각만 하고 특별히 %로 세금을 계산하진 않았었는데, W2를 받고 나서 30%가 넘는 총 세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절약을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이후로 아껴야 한다는 경제관념이 조금씩 생겨났던 것 같다. 


그리고 2014년 중반에 더욱 돈 모으고 살기 힘들겠다는 현실을 마주치게 된다


학생으로 지내면서는 사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아주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간혹 보이는 인종차별의 무지함과 더불어 큰 금액의 물품을 구매할 때 파이낸스나 리스가 불가능한 정도의 불편함이었는데, 취업을 하고 나니 큰 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의 OPT는 분실된 OPT의 원래 유효기간인 2014년 11월까지만 유효 기간이라서 나는 비자 진행을 서둘렀어야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내가 처음 목표했던 E2 Employee 비자를 회사에서 스폰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내 변호사나 고문 변호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대형 회사들은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부 비용만 회사에서 부담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비용을 커버해주더라도 워낙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서 총비용 중 소액만 직원이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몇 천불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 시중 가격보다 조금 할인된 가격으로 진행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E2 Employee 비자를 들어가는데 아주 많은 비용이 들게 되었다. 더군다나 일반 진행은 결과가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었기 때문에, 2주 안에 결과를 확실하게 받아볼 수 있는 프리미엄 프로세싱에 200만 원 가까이 추가 지출을 하면서 비자 진행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는 비참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문제는 이 비자의 유효기간은 2년이고, 2년마다 갱신은 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영주권에 들어갈 때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때까지 비자 유지 비용으로만 해마다 몇 백씩 들어갈 생각을 하고 나니 내가 미국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아있냐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스마트하게 일하던 꼭 잡고 싶었던 부하 직원들이 한국으로 귀국해서 삶을 살아가는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래도 남아서 꾸준히 더 도전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누군가 본다면 철없는, 계획 없는 결정이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이뤄야 할, 그리고 더 성공해야 할 알 수 없는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도전을 이어가게 되었다. 


2014년 초반에 입사한 지 반년만에 아주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정규 점포 부점장에서, 한인마트에 입점한 소규모 점포의 점장을 맡게 되었다. 아주 조그만 규모의 점포였지만 최선을 다해서 관리했고, 이런저런 다양한 프로모션 시도도 해봤다. 마트에 방문하시는 한인 어르신들이나 직원분들을 타깃 해서 좋아할 만한 프로모션과 함께 마트 이곳저곳을 카트를 끌고 다니며 시식 행사를 통해 점포 방문을 유도해보기도 했다. 그때 열정적으로 판매를 하고 성과를 보였던 덕분에 나는 얼마 후 맨해튼 브로드웨이 & 70가에 위치한 주거 상권 점포의 점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맡았던 정규 상권의 점장이라 부담도 있었고, 모르는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직원들이 불편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점장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다. 

정말 궃은 일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던 것 같다. 회사가 그렇게 만든 것보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그리고 1개월 뒤, 

갑작스럽게 공석이 된 뉴욕 타임스퀘어 지점의 점장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총 4층 규모의 대형 매장인데, 외관도 독특한 단독 건물이라 시선이 가고, 한국에서도 관광객이 오면 매우 반가운 장소이자 명소이기도 한 점포였다. 또한, 방송에도 나온 적이 있는 점포라 그런 점포를 맡는 점장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그리고 출퇴근할 때 바로 보이는 수많은 타임스퀘어의 네온사인들은 말할 수 없는 신비감과 기쁨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누구나 아는 그 회사의 타임스퀘어 지점


건물이 층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하루에도 수십 번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사무실이 2층에 있다 보니 1층에서 운영이나 고객 관련 문제가 생기면 오르내리기를 반복했어야 했고, 운영을 위한 물품이 배송되면 확인을 위해 지하도 갔어야 했고, 생산을 담당하는 장소가 1층과 3층으로 각각 나뉘어 있는 바람에 동선이 긴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가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가만히 앉아서 지시만 하거나 보고만 받는 점장 스타일이 아니라 직접 고객들과 소통도 하고, 직원들을 도우며 격려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오다 보니 유대 관계나 평가는 좋아졌지만 내 몸은 더욱 지쳐만 갔다. 기존에 근무하던 곳과는 달리 맨해튼 중심부로 출근을 하려다 보니 출퇴근 시간도 (회사에서 톨비와 월 주차비 제공을 해준 덕분에 운전을 하며 출퇴근했는데) 교통 상황에 따라 최대 1시간씩 길어지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퇴근할 때 보이는 타임스퀘어를 보며 힘을 얻곤 했다


그래도 처음엔 고생이 되긴 해도 꼬박꼬박 들어오는 주급의 매력도 있었고, 커리어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한 껏 동기부여가 되어 있던 터라 직장 생활에 큰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2014년 중반에 비자 때문에 큰돈이 나가고 난 이후부터 생각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 같다. 돈을 벌어도 버는 것도 아니었고, 힘들고 어렵게 고생을 했는데 정작 통장에 남은 돈은 크게 생기지 않았다. 학생 때는 졸업하고 취업만 하면 정말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성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외국인의 서러움을 겪고 나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결국 내 선택은 남아서 더 도전을 해보자는 것이었고, 나는 이왕이면 회사 안에서도 하루라도 더 빨리 승진하고,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점장으로 근무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들까지, 만들지 않아도 될 부수적인 보고 자료나 교육 자료들을 만드는 등 눈에 띄기 위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 안에서도 맡은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나름 스마트한 인재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나의 커리어 성공 못지않게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커리어도 빛나게 해주고 싶은 욕심도 생기게 되었다. 첫 근무를 시작했던 지점과는 다르게 타임스퀘어 직원들의 경우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인종을 떠나서 마음을 열고 자주 대화하고 내가 그들의 커리어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난 이후부터는 직원들과 항상 좋은 팀을 만들고 좋은 소통을 하게 되었다. 업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보니 엄격한 매니저의 모습이지만, 때론 개인적인 고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누구보다 더 마음 쓰고 챙겨주며 따로 사무실로 불러서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직원들과 소통하다 보니 직원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았고, 그것이 꽤 나의 적성에 잘 맞았다. 사실 이때 직접 소통하고 배웠던 코칭 경험과 스킬들이 훗날 글로벌 대기업에서도 빠르게 적응하고 인정받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점장으로 처음 면접을 통해서 뽑았던 직원의 마인드나 인성이 정말 좋아서 그 친구를 매니지먼트 인력으로 키워보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2014년 말에 Shift lead를 하는 포지션을 건의를 통해 새로 만들어 간접적으로 매니지먼트 인력으로 나아가는 첫 기틀을 마련해보기도 했다.

 


심리적 좌절도 많았고, 늘어난 지출에 생활비 감당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특유의 긍정적 사고와 미래 지향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 잡고 또 다른 도전을 이어 나가며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더 좋은 환경과 커리어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을 내기로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누군가는 지금의 내 자리라도 가질 수 있다면 분명 감사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긍정적이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오는 2015년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그렇게 나의 2014년은 저물어 갔다. 그리고 2015년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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