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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요커 Feb 23. 2021

EP6. 2015년, 미국, 그리고 운명

이러려고 미국에...?

2015년에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아주 많은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다양한 모습들을 겪어볼 수 있었고, 커리어적인 측면에서 아주 큰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내가 더욱 프로페셔널하게 성장하는데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곤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좋은 인재 확보는 곧 비즈니스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그리고 안정적인 운영이 될 수 있는 선행 조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은 주제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과감하게 미국 대학교들에 채용박람회인 Career Fair에 참석할 것을 건의했다. 보통 미국 대학교의 Career Fair에는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나 해당 지역에서 Local business로 유명한 기업들이 주로 참석하여 인재 확보를 위한 쟁탈전을 벌이는 대표적인 미국의 채용 경로이기도 했다. 그런 커리어 페어에 한국 회사로 참여를 하자는 건의는 조직 내에서 다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을 더욱 강하게 어필을 하였고, 늘 인원 부족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점포 매니지먼트 인력들의 사기 진작과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의견을 부각했고, 당시 권한이 있던 상사와 인사팀은 긍정적인 검토 끝에 참석을 결정하였다. 


다만, 여러 재정적인 이슈나 참석을 위한 네트워킹 등을 고려했을 때, 고객 서비스로 유명하기도 하고 커리어 페어 관련 운영이나 동선 등을 잘 알고 있는 나의 모교에 참석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관련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처음으로 Campus recruiter로 회사를 대표하여 채용박람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연히 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에겐 큰 인기가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이 회사가 어떤 회사 인지도 잘 모르는 미국인 학생들도 회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이력서를 건네러 오는 모습을 보면서 치열한 취업 시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학생 시절 커리어 페어에서 모습을 각인시키려고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내 모습을 회상할 수 있던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학생의 시선으로만 참석하던 커리어 페어를 리쿠르터 입장에서 참석해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이기도 했고, 직업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복장, 시선, 말투, 태도 등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도 그 지원자가 얼마나 간절한지, 준비가 되어있는지 등이 보이는 것도 신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해마다 이 회사를 떠날 때까지 회사를 대표해서 모교 및 뉴욕의 각종 커리어 페어에 회사를 대표에 참석하곤 하였다. 

Campus Recruiter로 모교 Career Fair에 참석 했을 때 모습


식음료와 연관이 있는 회사다 보니 뉴욕에서 레스토랑이나 음식 관련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업주들에겐 매우 악명이 높기도 하면서 동시에 소비자들에겐 철저한 위생을 보장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은 뉴욕의 위생 검사인 Health Inspection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점수가 좋은 경우는 1년에 1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여러 번 점검을 받아야 하는 위생 관련 점검인데, 점검 점수에 따라서 점포 입구 사람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높이에 (부착 높이에도 법적인 제한이 있을 정도로 깐깐하다) 부착해야 하는 등급이 표기된 결과표를 부착해야 한다. 등급은 가장 좋은 A등급부터 B, C, 그리고 보류를 의미하는 Grade Pending이 있으며, 위생이 좋지 않거나 심각한 위반 사유가 발견되면 즉시 혹은 영구적 영업 정지 조치가 내려지는 강력한 시스템이다. 최근에는 미국 여러 주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자 롤모델로 활용되고 있는 시스템이며, F&B 산업군에서는 매우 유명한 제도이다. 결과에 따라서 매출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다 보니 하나하나 준비가 매우 꼼꼼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직원들의 일상 습관까지도 잘 관리되고 훈련되어야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 


'C' 등급을 받은 뉴욕의 레스토랑들을 확인할 수 있다


뉴요커들은 온라인으로 모든 매장의 점검 결과를 점수뿐 아니라 위반 내역까지도 살펴볼 수 있도록 공개가 되기 때문에 더욱 매출에 미치는 영향을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건강과 위생에 아주 많은 신경을 쓰는 뉴요커들의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서 가장 큰 피해를 먼저 입었던 곳이 뉴욕이라는 점이 그때는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건강과 위생에 신경을 쓰는 중산층보다 빈곤층에서의 코로나 감염이 압도적인 비중이라 씁쓸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시스템을 준비하고 검사를 받는 것도 소중한 경험인데, 당시 회사에서는 그런 결과를 통보받으면 결과에 대하여 어필을 하거나 Court에 참석해서 점수를 깎으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 나는 점장으로 열심히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스팩터에 따라 평가하는 기준이나 점수가 달랐던 점도 억울했고, 검사서에 법원에 항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문구를 확인하고 리서치를 진행했다. 아직 그 시스템이 도입된 지 역사가 길지 않아 케이스가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법원에 출두해서 보조 자료 등을 통해 항의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아내고 상사의 허가를 받아 참석을 준비했다. 지적 당시의 사진과 상황 설명, 그리고 개선 사진, 억울함을 증빙할 수 있는 사진과 보조 자료, 그리고 언급을 할 내용까지도 모두 준비해서 직접 참석을 하게 되었다. 이런 항소를 전담하는 변호사를 보유한 외부 업체도 존재했지만 당시 타이트한 재정 관리 때문에 내가 직접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다. 


법원이긴 하지만 고등법원이나 범죄, 위반 등을 재판하는 일반 재판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항소도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재판장의 모습이 아닌 hearing이라고 불리는 공청을 위한 judge (officer에 더 가까운 느낌)와 사무실에서 단둘이 진행하게 되었다. 오른손을 들고 '양심에 따라~'를 선언하고 내 모든 발언이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받은 후 꼼꼼히 준비한 자료들을 내밀었다. 나중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항목들을 감면받고, B를 받아야 할 점수에서 A로 정정된 결과를 이끌어 낸 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반 직장인으로 들어가 회사를 변호하는 경험도 해보고 나니 무엇인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도 했다. 물론, 큰 회사 기준에서는, 그리고 정해진 롤이 아니며 전문적인 역할이 아닌 일을 내가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도 않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리스크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흔치 않은 경험임과 동시에 할 수 없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 내겐 매우 중요했고, 더욱 소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솔직히 미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들이 욕을 많이 먹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는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뒤로 밀어두고서라도 내 커리어 발전과 경험,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장점 등에서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사 나름이겠지만! 아무튼, 2015년에는 아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전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1월


나는 2010년 7월에 출국한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가 입사하고 받았던 비자의 연장 시점이 다가왔는데, 미국 내에서 연장을 할 경우 향후 2년간 또 출국을 하면 입국을 할 때 절차가 복잡하고 입국을 위해서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이번에 연장을 하게 되면 사실상 2년간 또 한국에 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것도 좋지만, 좋은 경험들을 쌓는 것도 좋지만, 벌써 몇 년째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움을 넘어 죄책감마저 들 정도로 나를 심하게 압박 해왔다. 인터넷 전화가 있어 통화는 자주 드렸었지만 화상 통화를 자주 하는 살가운 아들은 아닌지라 아주 오랜만에 한 번씩 부모님을 영상으로 뵙고 나면 2010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과 다르게 나이가 들어가시는 모습에 늘 마음이 아팠고, 이번에도 가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고용을 유지하면서 한국에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은 받고 있던 E2 Employee 비자를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신청하여 그곳에서 인터뷰를 통해 비자를 받는 방법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진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운 수준이라 변호사도 적극적으로 말리며, 영주권 들어간 이후에 출국하기를 권장했다. 미국에서 비자를 진행하거나 연장하는 것은 변호사가 대신 진행해서 해주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한국에서 신청하는 경우 반드시 영사 인터뷰를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철저한 검증을 하는 편이라 굉장히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훗날 이야기지만 직장 내 다른 한 명도 같은 시도를 이후에 했다가 비자가 거절되어 입국을 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생길 정도로 조심스러운 판단을 내려야 할 문제였는데, 도저히 가족을 외면하고 살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상사들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인사를 건네며 한국으로 출국 준비를 했다. 변호사 사무실의 실수로 인하여 원래 예정되었던 일정보다 1개월이 미뤄지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철저한 인터뷰 준비와 공부를 한 후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비자를 받아야 출국이 가능한 상황이었고, 휴가 기간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도착 후 바로 다음날 비자 인터뷰를 보게 되었고, 굉장히 어려운 인터뷰였지만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하고 있는 업무들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해주시며 길게 받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신 좋은 미국인 영사님 덕분에 보통 2년을 받는 비자를 5년이나 받으며 향후 5년간의 비자 걱정은 덜어낼 수 있어서, 그리고 이제 5년간은 자유롭게 입출국을 할 수 있어서 아주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맞이한 순간들은 눈물의 기억뿐이었다. 부모님 눈에는 그동안 힘들게 타지에서 고생하던 아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그동안 힘들게 그런 아들을 뒷바라지해주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의 모습에 주체하지 못할 눈물들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모아둔 것이나 벌었던 것이 많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었다. 태어나서 처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내에서는 부산으로 가족 여행을 가서 처음으로 엄마 손을 잡고 함께 이른 새벽 해운대 해수욕장을 걷기도 했다. 참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 엄마는 항상 내가 어릴 적에도 시장에 갈 때나 함께 병원에 갈 때도 꼭 내 손을 붙잡고 다녀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가 내게 준 사랑을 언제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해오지만 그래도 이렇게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나마 적어서 표현하면 이 글을 읽는 엄마도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주실 것이란 생각에 담담히 마음을 눌러 담아 적어본다. 


11월 말 미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된다.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동료의 퇴사 소식을 듣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인사를 나누자는 연락을 했고, 그렇게 만나게 된 날이었다. 


같은 마케팅팀 소속 디자이너의 이름과 함께 


"그분 만나볼래요?"


"네???"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내 소개팅이나 연애였기 때문에, 그리고 퇴사 인사를 나누려던 자리에서 갑작스러운 동료의 제안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촉이 있는데 둘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만남에 대한 제안을 받게 된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회사 생활에 대한 큰 열정이 있었고, 또 다른 부서의 사람을 가까이 알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남녀 사이가 아니더라도 만나서 식사 한 번 해보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수락하게 되었다. 그분과는 같이 근무한 시간은 길지만 부서나 사무실이 정말 달라서 신기하게도 전화 통화 1~2번 외에는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어나서 소개팅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잘 몰랐지만, 그래도 매너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분의 집 앞으로 식사를 위해 데리러 간 날 조수석에 꽃을 준비했다. 당황하며 놀랐던 그분의 모습도 잠시,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꽤나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몇 번 좋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훗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감과 영향은 주는 아내가 되게 되었다. 


정말 인연이라는 것이 신기하게도, 

한 번도 소개팅도 해본 적 없고 싫어했던 소개팅을 통해서,

한 번도 사내연애도 해본 적 없고 싫어했던 사내연애를 통해서,

나는 내 인생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여러모로 행복한 기억이 많았던 나의 2015년은 그렇게 나의 연인과 함께 저물어 갔다. 그리고 서로에게 큰 힘과 동기부여가 되어주며 우리는 2016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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