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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요커 Feb 10. 2021

EP4. 2013년, 쉽지 않았던 미국 취업 이야기

좌절, 그 이후 이야기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던 2012년의 마지막을 겪고 난 나는 사실 더욱 견고하게 미국에서 살아남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순전히 타의와 사건으로 인해서 인생에서 처음 3개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 찾아오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이렇게 쉬어도 될지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많았고, 그때 신분과 문화, 지리, 그리고 언어에 대한 공부를 참 많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큰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보이진 않지만 더 먼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비자 (VISA)는 필수 요소이다.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라는 졸업 후 외국인 유학생에게 주어지는 프로그램 이후에도 고용을 유지하려면 비자를 제공해주는 회사를 찾아서 비자 스폰서십 진행을 해야 하는데, 외국인 유학생들은 주로 H-1B라고 불리는 비자를 사용하여 취업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나 또한 그런 프로세스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USPS의 OPT 분실 사고로 인해 나는 H-1B를 지원할 수 있는 기간적 여건이 되지 않았고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모색했다. 


그 결과 E2 Employee VISA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나 회사가 투자한 회사 지분이 50% 이상을 가진 미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에는 나의 국적이 대한민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취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회사의 미국 내 투자 금액, 고용 창출 정도, 고용된 직급 레벨 등에 따라 자세한 조건이 있긴 하다). 그래서 취업 전략을 수정해서 미국에 진출한 대한민국 국적의 회사들을 찾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많은 연락과 면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인마트의 본사 구매부서부터 자동차 업체, 그리고 협력 업체들 등 다양한 분야와 직종으로 취업에 지원을 했다. 파트타임으로 식음료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해왔다는 점과 미국에서 졸업한 대학원이 Culinary art로 유명한 학교여서 그런지 Food & Beverage 산업 쪽으로 커리어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도 Food Service를 제공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많은 업체들 중 식음료와 관련된 회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에만 해도 기업 평판을 떠나서 미국에 진출했던 식음료 관련된 회사들 중 S그룹 산하의 P사만큼 규모가 크거나 '기업'으로 분류될 만한 규모를 가진 업체를 찾기 힘들었다. 당시 P사는 더군다나 모든 매장들이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커리어를 쌓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는 면접에 초대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유학했던 도시와 뉴욕은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었기에 화상 면접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대면으로 찾아뵙고 면접을 봐도 괜찮을지 문의 후 그렇게 진행을 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그때 발목에 깁스를 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는 열정을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나름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었다. 


아프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다면서...


뉴저지에 위치한 본사에서 면접을 보통 진행하나 당시에 공사가 진행 중이라 뉴욕에 위치한 한 점포에서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내가 지원했던 포지션은 Assitatnt manager인 부점장 직급의 현장 관리직이었다. 쉬운 업무들은 아니었지만 미국 문화를 일선에서 배워나갈 수 있고, 언어적으로도 조금 더 원활하게 업무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에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업무가 많고 힘들다 보니 일부 동료들은 회의적인 시선이 많은 직급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래도 부점'장'이라는, 누군가 함께 일하는 동료와 직원들을 책임을 지고 이끌어야 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스스로 세뇌를 하고 이 악물고 버텼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내가 꿈꾸던 방식의 직장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합법적으로 미국에 남아서 취업을 하고 커리어를 쌓아볼 수 있는 기회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더 나아질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때였다. 


그리고 남들이 미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들에 대한 악평과 부정적 의견을 나누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는 맞는 말도 많고 틀린 말도 많다. 특히 회사에 따라서 그런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개인보다 조직, 회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도 현실이다. 나는 그때 내가 어쩔 수 없이 한국 회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때, 더 큰 그림을 보고 그런 문화에서도 잘 적응하고 타인과 팀을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는 커리어를 만들어 메이저 회사들에 도전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지금 누군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비자, 영주권 때문에 차선책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면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긍정적인 마음 하나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인내심을 키울 것을 항상 추천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더 큰 꿈과 미래를 그린다면 어쩔 수 없이 겪고 넘어야 할 고통일 수 있기 때문에 (운과 시기가 좋아서 그럴 필요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꼭 긍정적인 마인드셋을 갖추길 추천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무했던 미국에서의 실전 경험과 부족한 어학 실력을 가지고 메이저 회사에 바로 진출했다면 실적을 중시하는 미국 회사에서 내가 잘 견뎠을까 싶은 막연한 궁금증도 있다. 어쨌든 나는 이 회사에서 열심히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함께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버티고 또 버티기로 했다.



프로비던스에서 뉴욕으로 이사 올 때는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헤이코리안'이라고 불리는 한국어로 된 여러 가지 생활 정보 사이트를 통해서 부동산 중개인을 1명 고용해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생활하면서 사용하던 가구들이나 생필품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유홀'이라는 트럭을 빌려서 모든 짐을 셀프로 넣고 트레일러에 내 승용차를 매달고 뉴욕에 왔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삿짐을 풀 수 있었다. 


프로비던스에서 내가 지출하던 월세는 거실, 침실 1개, 화장실 1개인 1 bed & 1 bath 기준으로 $650이었다. 거리가 학교가 다운타운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렇지 혼자 살기엔 그래도 살만한 컨디션이었고, 월세는 저렴한 편이었다. 뉴욕에 중개인 아저씨와 함께 리스팅에 나왔던 집들을 구경 갔는데, 뉴욕의 살인적인 월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650 내고 살던 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허름한, 그것도 뉴욕 맨해튼도 아닌 외곽의 반지하 집이 $800은 쉽게 넘어섰다. 하지만, 시내와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 거리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인데 $800을 내고 그런 컨디션에 살 자신은 없었기에 예산을 조절했고, $1,000~$1,100 사이의 반지하들은 적어도 빛은 잘 들어오는 편이라 혼자 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배정받은 점포에서 10분 거리인 곳에 그렇게 월세 $1,050짜리 반지하에 이사를 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주인은 그 이후 4년가량 월세를 올리지 않아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살면서 생전 꿈꿔본 적이 없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꿈꾸는 도시인 '뉴욕'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2013년은 저물어 갔다.

2021년,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직접 찍은 뉴욕의 해 질 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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