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들어서야 나는 나 스스로가 미국 대학원의 대학원생이라는 현실 자각과 함께 부끄럽지 않은, 어설프게 와서 학위만 따고 돌아가는 일부 철없는 유학생이 되기는 싫다는 각오를 다지고 정말 '죽어라' 공부하고 성적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노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매우 신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모든 시험, 발표, 조별 과제, 토론 준비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준비한 적이 없었다.
2010년 말까지만 해도 수업에서 어떻게 해야 돋보이고 교수님들이 예뻐할 수 있는 소위 모범생이 될지에 대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 스스로 좋은 학생이자 당당한 석사 학위 보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성적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군 입대 전 신입생이던 2004년 1학기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내 모습에 너무 큰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나의 전공이었던 호텔경영학이 너무 좋아지게 되어 군대를 다녀온 1학년 2학기 이후로는 장학금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사실, 조금 막무가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공 서적을 쉼표 하나까지도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갈 때도 항상 전공 서적과 더불어 A4 용지 수 십장을 들고 가서 내가 외운 내용을 '깜지' 쓰듯 적어 내려갔었고, 그렇게 항상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2011년에 미국 대학원에서 새 학기를 맞이하면서 그때의 나의 모습이 생각나게 되었고, 나는 '문자만 다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익숙한 언어는 아니었기 때문에 곱절의 시간은 더 필요했었고, 파트타임 일과 더불어 공부를 하려니 잠이 부족한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에 정기적으로 노숙자 센터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늘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것 같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방법도 더욱 완벽하고 싶었던 마음에 나 스스로를 혹독하게 대했다. 발표할 내용을 A4 용지에 모두 출력하고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모든 단어까지 완벽하게 외우기 전까진 나는 용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용지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발표 내용이 모두 내 입으로 나오게 되면 나는 녹음기를 틀고 내용을 녹음했다. 영어를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은 아니다 보니 내가 죽어라 고생해서 노력해도 발음이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보고 싶었고, 녹음기의 발음을 수십 번 듣고 교정해가면서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끌어올려야 했다.
100% 만족할 순 없어도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쯤 나는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곤 정면의 그 카메라와 더불어 좌우에 시선이 향할 포인트들을 잡고 아이 컨택트와 제스처를 하면서 발표 연습을 했다.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어도 비디오 속 내 모습을 보면 형편없기 그지없었고, 고치고 또 고치게 되었다. 그리고 발표 당일이 되면 나는 2시간 일찍 강의실로 향해서, 강의실이 비어있다면 실제로 강단 앞에 서서 발표하는 연습을 했고, 강의실에 수업이 진행 중이라면 강의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넣고 쉼 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지독하게 하다 보니 성적은 자연스레 좋아질 수 있었고, 그런 나의 준비 자세가 교수님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면서 한 번은 한 교수님의 신입생 대상 학기 첫 수업에 바람직한 프레젠테이션 예로 신입생들 앞에서 10분짜리 짧은 강의를 진행해보기도 했다.
만족스러운 점수들을 얻고 있었지만 늘 힘들고 아쉬운 한 가지가 있었다. 월세를 아끼느라 나는 월세가 비싼 학교 캠퍼스 주변이 아닌 버스로 1시간 가까이 떨어진, 버스의 종점이자 아시아 사람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지역에 월세를 얻어 생활하고 있었고, 시설도 그리 훌륭한 시설도 아니고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 근처라 공부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을 애용했는데, 그마저도 버스 막차 시간 때문에 8시면 급하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11시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할 수 있었던 차 있는 학생들이 정말 부럽기도 했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초까지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 가며 공부하던 어느 날
나는 대중교통이 매우 잘 발달한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에서는 직장이나 학교 가까이 살지 않는 이상은 차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슬픔에 울부짖게 된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다. 폭설이 예보되었지만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일요일에 한인 교회에 갔다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인 교회는 미국 생활에 있어서, 특히 조그만 소도시 생활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자 많은 인맥을 만들고 생활에 필요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곳이었다. 그래서 꾸준히 주일에 나가면서 정보뿐 아니라 음식도 얻어오기도 하고 배고픈 유학생이었던 나에겐 감사함이 많은 곳이었기에, 눈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찾아가게 되었다.
눈이 제법 쌓였으나 차들이 통행을 하는 데는 불편함은 없었고, 버스도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었다. 눈이 와서일까? 그 날따라 나는 친구들과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막차였던 8시 버스를 Providence 시내 중심가의 터미널에서 타게 되었다. 한참을 잘 달리던 버스는 Stop & Shop이라는 식료품점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은 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잠깐 섰다가 종점을 향해 달려야 하는데, 웬일인지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기에 슬쩍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안 승객들이 모두 하차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내가 버스를 잘못 탔거나 뭔가 모르는 일이 생기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버스 번호를 확인했지만 문제는 없었고 그래서 출발하겠거니 하고 앉아 있는데, 기사는 나더러 종점인데 안 내리고 뭐하냐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도, '이 버스 종점은 North Providence 아니야?'라고 반문했다. 기사는 나더러 '오늘은 일요일이고, 일요일 막차는 여기까지만 운행이야'라고 이야기해줬다. 아뿔싸! 부랴부랴 항상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던 버스 시간표와 노선도를 꺼내어 비교해보니 일요일은 우리 집에서 약 15 정거장 전인 이곳까지만 운행하는 것이 맞았다. 버스를 택시 마냥 집까지 가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당시에는 우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존재했더라도 모르기도 했고, 그 도시엔 99.9%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이나 뉴욕처럼 길에 택시가 돌아다니는 것도 전혀 없고, 오직 도미니카나 중남미 사람들이 운영하는 콜택시만 존재하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불러서 또 집까지 이동하려면 내 수중의 돈으론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두려울 것은 없었다. 오가는 길은 익숙했고, 다소 위험한 동네는 이미 지나왔기에 걷기에 무리도 없었다.
그런데,
쏴아~ 쏴아~
이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머리 끝부터 속옷까지 잔뜩 물에 적셔졌다. 쌓였던 눈이 오가는 차량과 온도에 의해 녹기 시작하면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내게 물을 퍼부었다. 외진 곳이라 인도도 잘 갖춰지지 않았었고, 그나마 인도가 있는 곳들도 도로 제설을 위해 제설차들이 길가로 눈을 쌓아뒀기 때문에 차 옆으로 아슬아슬 걸었어야만 했고, 튀는 물들을 피할 곳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나는 40분을 걷고 또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말없이 온통 물로 가득 찬 신발과 가방들을 벗었고, 옷을 벗고 곧장 화장실로 가서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는 한 20분을 소리 내며 통곡하며 울었다. 비단 오늘일 때문에 서러워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홀로 미국 생활을 한지 반년이 넘어가는 동안 나름 즐겁게 생활하고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마음 한편에 또 다른 나는, 타지에서의 생활과 익숙하지 않은 언어, 문화, 그리고 악바리 근성으로 버텨나가던 내 모습에서의 스트레스 등 매우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얼굴과 몸을 타고 흐르던 뜨거운 그 무엇은,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인지, 흠뻑 젖었다가 체온에 따뜻해져 흐르는 물인지, 아니면 내 눈에서 나오는 서러움의 눈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쩌면, 포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 다시 한번 나를 붙잡아줬던 건 출국장에서의 부모님 모습이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이곳에서의 어려운 생활과 낯선 환경, 그리고 우울함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의지가 약하다', '배가 불렀다'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개인이 처한 상황들은 다양하고 다르다 보니 꼭 유학생들이 풍족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만 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주위 학생들을 많이 보기도 했고, 안타까운 마음이 항상 들게 된다. 내가 그런 마음이 들게 된 것은 그때의 나도 그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였는지 모른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서러움을 느낄 일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밤새 고민을 했고, 어려운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그때 그 마음을 담은 편지를 부쳤다면,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의 후회거리 하나는 만들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나는 편지를 적고 나서 너무 비참 해 보이는 내 모습과 어렵게 살고 있다는 투정을 부리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마음을 가라 앉히고 냉담하게 중고차 구매의 필요성을 인터넷 전화로 요청드리게 되었다. 가뜩이나 학비에 생활비 지원 등 정말 등골이 휘게 만드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던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다시 아프게 해 드렸고, 결국 또 내 방식대로 고집과 투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되었다. 집 앞 중고차 매매상에서 익숙한 국산 자동차이지만 주행거리 16만 Km가 넘는 차를 구매하게 되었고,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그 차를 타고 열심히 도서관에서 시간을 더 보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보답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시간 운영과 동선 등이 훨씬 자유로워졌던 나는 성적, 견문, 문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적응과 개선을 하게 될 수 있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로드아일랜드 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나는, 차를 타고 인근의 보스턴, 코네티컷 주 등 다양한 곳을 방문해보면서 미국의 다양성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고, 그렇게 나의 2011년은 조금씩 조금씩 미국에 더 적응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게 되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가뜩이나 힘들게 일하시는 두 분을 더욱 쥐어짜게 만들어 지금도 마음이 무거운 2011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졸업을 앞둔 2012년을 더 독하게, 그리고 더 치열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심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한 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2011년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