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생활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해를 고르라면 단연코 2012년일 것이다. 힘든 도전이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고, 시험과 논문 등 모든 것을 잘 마무리하고 나는 미국 석사 졸업이라는, 내 인생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이뤄냈다. 중도 포기나 수료로만 그치지 않고 정식 학위를 받고 졸업을 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오는 성취감은 정말 대단했다. 힘든 환경이라 그랬는지 그 노력과 성취에 대한 축하도 달콤했고, 그 기쁨도 배가 되어 정말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수록 마음속 허전함과 슬픔도 늘어만 갔다.
졸업식이 다가오자 한국에서는 하나, 둘, 주변 유학생들의 부모님들이 프로비던스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파트타임 일을 하던 식당에도, 일요일마다 나가던 교회에도, 자주 놀러 가던 친구들 집에도. 주변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졸업식을 위해서 머나먼, 그리고 비싼 비행기표를 끊고 달려와 축하의 식사와 그간의 고생에 대한 회포를 푸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면서도 내심 나의 부모님에 대한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가게 문을 닫고 오기엔 생계도,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고 계시던 부모님을 잘 알기에, 나는 졸업식에 부모님과 함께 참석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미안해하시는 어머니께도 한사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오셨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었고,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철저히 감추고 내가 아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졸업식 장면을 전 세계로 생중계해줬다는 점이다.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후였으니 한국에서는 한창 새벽일 시간에 부모님은 수많은 졸업생들 중 내가 호명되어 학교장과 악수를 나누고 학위를 수여받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을 알고 있었기에 내 마음을 담아 짧게 종이에 한마디를 적고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2년간의 감사함을 담은 것치고는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았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
11월에 졸업을 하면서 Career fair와 교수님들의 추천을 통해서 나는 제법 많은 회사들과 인터뷰 연결이 되었고, 감사하게도 글로벌 대기업들을 포함한 많인 회사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이제 나는 9월에 신청했던 OPT라고 불리는 외국인 유학생이 졸업 이후 취업을 해서 실습을 할 수 있는 허가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통상 3개월이면 나오던 시기였던 터라 모든 회사들과 1월에 최종 합격 여부를 정하고 회사를 고를 행복한 일만 남아있었다.
12월 24일, 25일, 26일... 그리고 27일!
온라인 상으로 조회를 했을 땐 나의 OPT가 허가되었고, 실제 신분증처럼 입사를 할 때 등록을 해야 할 카드가 배송 중이라는 알림을 12월 초에 받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27일에 마침내 우리 동네 우체국에서 자택으로 배송을 나갔다는 'Out for delivery'라는 상태로 변경이 되었다. 같은 날이면 배송이 되어야 할 우편물이 오지 않았고, 그때까지도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1월 1일이 될 때까지도 주말도 끼고, 연휴이고 물량이 많아서 배송이 되지 않는다고 집배원의 노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월 2일이 되자 희망에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은 분노와 좌절, 그리고 초조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체국에 전화와 방문 문의를 하니 자기들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배송을 담당한 집배원을 알려달라고 하니 알려줄 수 없다고, 불만이 있고 더 자세한 조사를 원하면 지역 우체국 슈퍼바이저를 찾아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수 있지만 슈퍼바이저도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한번 잘 찾아보라고 지시는 하겠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슈퍼바이저에게 노발대발하면서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원래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최종 배송을 담당한 우체국의 일반인 접근 금지 구역까지도 들어가서 바닥까지 샅샅이 함께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우체국 본사에 항의를 해봐도, 이민국에 전화를 해봐도 바뀔 수 있는 사실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시 새로운 OPT 신청을 해야 했고, 또 다른 3개월을 허공에 날리게 되었다.
내게 관심이 많았던 회사들은 모두 채용 계획이나 인터뷰 스케줄을 취소했다.
원래 나의 계획은 12월에 OPT가 나오는 대로 입사를 해서 1~2개월 동안 철저하게 내 잠재 능력과 업무 능력을 보여서 바로 4월에 들어갈 H-1B 비자 스폰서를 받아서 커리어를 키워나갈 계획이었다. H-1B는 유학생에서 영주권으로 갈 수 있는 일반적인 코스였고, 글로벌 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비자는 1년에 딱 1회만 동시 모집을 한 후, 추첨을 통해 제한된 숫자 내의 인원을 선발하며 비자를 제공하는 전문직 비자인데, 사실상 예술이나 스포츠 등 특수직이 아닌 일반직의 외국인들이 취업을 하는데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될 비자이다 보니 경쟁이 치열한 비자이지만 석사 출신이라 추첨에도 조금 더 유리한 비자라 도전해볼 만한 비자였고, 나를 마음에 들어했던 회사들도 충분히 스폰서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던 터라 계획대로 일이 풀리기 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집배원의 실수와 더불어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조사로 인해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국에 꼼짝없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미국에 남고 싶었던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그때 이런저런 비자들에 대한 공부를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재직 상태가 아닌 졸업생 신분이고 아직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터라 회사 변호사나 법률적 자문을 구할 수 없어서 수많은 글들을 찾아가며 비자들과 내가 적용해볼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 아주 많은 연구를 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 그렇게 공부를 했던 것들이 더 나은 나의 상황을 가져올 수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브런치나 유튜브를 통해서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 나눌 수 있음에 매우 감사하고 의미 있는 연구였지만, 사실 그때 당시에는 정말 힘들고 답답했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막한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열정적이었고 졸업과 함께 행복했던 나의 2012년의 마지막은 크나큰 좌절로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