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요커 Feb 05. 2021

EP1. 2010년, 그리고 Providence, RI

나의 부모님은 2020 현재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을 요식업에 매진 하셨다. 당신들은 '식당' 운영을 자랑스럽게도, '셰프'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자신을 꾸미지 않지만, 30 중반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사시사철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도전하는 부모님이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정말 자랑스럽고 멋진 나의 부모님


2010년에 나는, 지금의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에도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다쳐가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모으고 생계를 이어 나가던 부모님이었고 여전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장님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저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면 다 들어줄 것 같은 요술램프 속 지니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끝나가는데도 그렇게 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철이 없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군대를 다녀오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틈틈이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철이 들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2009년이 끝나가던 즈음에 막상 나도 졸업할 시기가 되니 취업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내 인생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들게 되었던 것 같다. 어디서 바람이 들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호텔 경영학을 전공한 나는 hospitality, 즉 고객 서비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 '석사' 유학이라는 우리 집 환경에는 얼토당토 하지 않는 희망 사항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 요술램프 지니인 부모님께 소원을 빌어볼까?


전주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2년 동안 구두 다섯 켤레의 밑바닥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밥 먹듯이 새벽까지 마감일을 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모아둔 것이 없었다. 사실 벌이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학생 치고는 제법 두둑하게 벌었을 테지만, 여행을 좋아하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나는, 여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놀러 다니기 바빴고, 그만큼 내 인생에 있어서 계획도, 경제관념도 '제로'였던 사람이었다. 솔직히 지금 글을 쓰기 전까지는 2010년을 생각하면 내 과거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죽어라 공부해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군대 다녀와서 철들고 열심히 살았던 떳떳한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노라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기도 했는데, 문득 모니터 앞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조용히 글을 쓰면서 돌아본 진짜 '나'는 누군가 날 보고 있다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고 싶고 부끄러울 정도로 인생에 무책임했던 것 같다.


내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철이 있었더라면, 지니에게 소원을 빌기 전 내 부모님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는지 알았어야만 했다. 장사로 맞벌이를 하시면서 아들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미안함에 어릴 적부터 해달라는 것은 빚을 내서라도 해줘야 했던 내 부모님의 사랑을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고, 여느 때처럼 당연하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유학을 다녀오면 무언가 삶이 나아질 것 같았고, 어렵게 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부모님도 한 방에 털어내고 편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적 환상과 무감각한 경제관념, 그리고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던 속 편한 내 생각이 빚어낸 종합적인 결과였다.


못난 내 성격은, 꼭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이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유학에 한 번 꽂힌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동을 많이 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손님들 앞에서, 바쁜 엄마 앞에서 시시 때때로 유학 이야기를 꺼냈고, 뜻대로 선뜻 허락을 받지 못하자 온갖 핑계와 이야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생떼를 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출을 받아서 집을 짓고 그 아래 가게를 만들면서 힘들게 갚아 나가던 빚에 더욱 빚을 내라고 부모님을 독촉하던 꼴이었고, 경제관념이 없던 나는 대출 이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뭘 해도 세상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인데, 철없는 과거 콘테스트라도 나가면 우승할 자신감이 생기는 건 왜일까? 세상 철이 없어도 이렇게 철없는 장남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지금도 너무나 부끄럽다.  


그래도 내가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느꼈던 순간은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부모님과 이별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그리고 받는다면 얼마나 받는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부모님으로부터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그랬던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 해왔는데, 내가 출국장에 들어서면서 돌아본 부모님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생생했다.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출국장 문 밑으로라도 마지막까지 내 모습을 눈에 담으시려 바닥까지 얼굴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려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눈을 감고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모습이며,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욱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들게 만드는 모습이다. 지금도 내 생계와 일에 바빠서 지치고 피곤해서 부모님 걱정을 잠시 미뤄 놓다가도 그 모습만 생각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게 되곤 한다. 무뚝뚝하지 않을진 몰라도 부모님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을 한 적은 없어서 쑥스럽지만 사실 그게 이제 남은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안에서는 나만의 사랑 표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어쨌든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행인 것은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었던 2010년 말에 나는 무슨 자신감인지 오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수업 중 일부 나쁜 학우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이 악물고 무조건 그 부류의 학생들보다는 나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나를 힘들게 유학을 보내주시기로 했던 부모님의 결정을 결코 헛되거나 후회할 일로 남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몇 배는 더 키워줬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나 자신에게 훨씬 더 혹독하고 철두철미 하게 준비했어야 했고, 2011년 한 해를 새롭게 바뀐 나의 모습으로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2010년을 마무리 지었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미국 생활 11년, 그리고 11개의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