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업 응급의학과 1회 전문의 인터뷰

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03

"병원에 온 사망환자를 CPR을 하자고 하더라고.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응급실 직원들 모두,
무슨 시체를 CPR을 하나? 그래서 시체를 CPR을 한 게,
레지던트 처음 하면서부터 그러다가 10번째인가 11번째인가?
시체가 심장이 뛰더라고. 시체도 심장이 다시 뛰는구나 이랬고."


"20번짼가 됐을 때는, 아직도 이름이 기억이 나.
그때 CPR을 꽤 오래 했어요. 40분 뭐 그 정도 한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심장이 돌아와서,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3일인가? 눈을 뜨고. 한 이틀 뒤에 의식이 깨끗해지더라고요.
이래서 시체도 잘하면 눈을 뜨는구나."


"일본 갔다 와서 임경수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우리 생전에 저런 응급실을 만들 수 있을까.
특히 그때 우리 모델은 기타가토 응급센터 같이 만드는 거였지.
근데 딱 15년 걸렸지. 원주가 지금은 더 낫지."


안무업 선생님5.png


이름 : 안무업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34번

수련병원 :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현근무지 :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Q 원주세브란스 의국을 처음에 같이 하신 분은 누구신가요?


A 제가 혼자 시작을 하고, 지난번에 잠깐 얘기했지만, 김성중 선생하고 장석준 선생님이 있었고, 그리고 송근정 선생, 최옥경 선생. 크게 연대 나온 선생들로 시작한 거죠.




Q 임경수 선생님하고 황성오 선생님이 처음부터 같이 계셨던 건가요?


A 황선생님이 내가 갈 때 스텝으로 오셨어요. 그다음에 과를 연 분은 강성준 교수님이었습니다.




Q 또 다른 선생님이 계셨군요?


A 강성준 교수님이라고, 원래는 thyroid(갑상선)를 하셨는데, 응급센터장을 맡으면서, 이한식 교수님하고 응급의학과를 만들자. 그래서 그분이 외과지만 응급센터장을 맡아서 응급의학과를 만들고, 그때 군대에 계시던 임경수 선생님을 오라고 한 거지. 그래서 임경수 선생님이 와서 한 2년 있다가, 황성오 선생님이 응급의학과를 보니까, 그때 일본에 가서 응급의학과를 보고 그랬는데, cardiology(심장전문의)가 필요하다 그래 가지고, 그때 세브란스에 가서 황성오 선생님을 삼고초려로 계속 가서, 같이 한 번 해보자고 얘기를 했고. 황성오 선생님이 마침 resuscitation(소생의학)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resuscitation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그래서 황선생님이 오시는 해에 제가 레지던트 1년 차를 시작한 거죠.




Q 황성오 선생님을 임경수 선생님이 픽업하셨군요?


A 그렇죠, 강성준 선생님이 임경수 선생님, 임경수 선생님이 황선오 선생님. 이렇게 되는 거죠.




Q 그럼 선생님께서는 응급의학과의 존재를 언제 인식하셨습니까?


A 학생 때 이제 돌아가신 이부수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시는 데, 그분이랑 강의를 듣는데, 그때 교수님이 지훈상 선생님이었어요. 그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Traumatology(외상학)에 대해서 강의를 오셨어요. 그때가 아주 한여름인데, 그때 Traumatology에 대해 강의하면서, "미국에는 응급의학과라는 게 있다, 이런 일을 한다"라고 하면서 그때 우리 의과대학 교수님들이랑 외국 사진 보여주고. 보니까 의사들이 현장에 나가더라고.


와 저거 멋있다. 그래서 이부수 선생님하고 같이 응급의학과나 해보자고, 그렇게 얘기가 나온 거야. 그래서 그때는 우리가 어릴 때니까 “우리 유학 가자” 이러면서 폼 잡고 그랬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 나는 그때 여주에 있었고, 부수는 그때 군대 갔다 1년 늦게 졸업해서 다시 만나서 “우리 무슨 과 할까?” 이러다가 또 여전히 술도 한 잔 했겠다, 우리 응급의학과 가자 이렇게 얘기를 했었죠.




Q 지훈상 선생님께서 처음 소개를 해주셨고?


A 그 강의, 미국 응급의학을 소개해 준 게 아주 계기가 되었어요.




Q 그래서 이부수 선생님하고 가서 지원하겠다고 인사를 드렸나요?


A 근데 우리가, 군대 마치고 인턴 할 때까지 응급의학과가 안 생긴 거지. 영동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장석준이랑 김성중 선생이 시작한 지는 몰랐어. 응급의학과가 있다, 이 정도만 안거죠. 근데 트레이닝 과정이 없으니까, 유학 가자 어쩌자 했는데, 뭐 말처럼 쉽진 않고.




Q 그럼 이제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신 건가요?


A 그래서, 그때 부수는 영동 세브란스에 가서 인턴을 하고. 이부수 선생이 나보다 1년 늦었어. 나는 그때 응급의학과가 없으니까 선배가 안과를 해보라고 하셔서, 청량리 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서 픽스턴을 돌고 있는데, 이제 응급실에 있으면서, 그때 픽스턴 제도라는 것이 있었어. 그래서 이제 거기를 왔다 갔다 하는데, 왔다 갔다 하려니까 응급실 근무를 자원해서 하고 있었지. 응급실이 재미있기도 하고. 근데 그 임경수 선생님이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를 뽑는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가서 애들한테 얘기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얘기 안 했죠. 그러고 나 혼자 지원했죠.




Q 하겠다고 하니까 임경수 선생님이 되게 좋아하셨겠어요?


A 그때는 임경수 선생님은 가능하면 킴스(Kim's; 군보)를 뽑고 싶었어, 지금도 킴스, 넌킴(Non-kim's; 비군보) 있죠? 어쨌든 넌킴 한다는 친구가 있으니까. 그때 왜 킴스를 뽑고 싶었냐 하면, 군대에서 쓰기 시작하면, 응급의학과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널리 홍보가 된다고. 응급의학과 킴스를 많이 뽑으려고 애를 많이 쓰셨지. 그러면서도 네가 하면 영동 얘기도 하고, 어쨌든 할 수 있을 거다 이런 얘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서 안과 픽스턴 하다가 때려치우고, 거의 막판에 인턴 끝나기 한 달 전쯤에 원주에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를 뽑는다고 그래서 시작한 거예요.




Q 그럼 타이트하게 지원하셨겠네요.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그 과에 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요?


A 워낙 그냥 내가 결정하고 한 거라서. 근데 그때는 이미 결혼을 했을 때니까 우리 애들이 “아빠 뭐하니?” 이렇게 물어보면 보통 내과, 외과라고 대답하면 편할 텐데, 응급의학과 이러면 설명을 해야 되니 그런 불편함이 있었지요. 우리 부모님도 "아드님 뭐하세요?" 그러면 처음 들어보는 과니까 그런 불편함은 있었지.




안무업 선생님1.png


Q 임경수 선생님이 응급의학과를 뭐라고 설명해주시던가요, 처음에 지원을 했더니?


A 음, 그 임경수 선생님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나는데, 무슨 과야 이 말을 먼저 하신 건 아니고, “전문의가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어.”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근데 응급의학과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던 게 이미 강의가 있었어요. 강의가 Traumatology랑 응급의학과란 뭐다 이런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응급의학과가 뭐다 하는 게 원주나 세브란스나 뭐 강의 때 배우니까 딱히 설명은 필요 없었어요.




Q 처음 근무 가셨을 때 생각이 나세요?


A 그때는 모든 과가 그렇듯 100일 당직이 있었어요. 100일 당직은 근무시간 오프시간 없이 그냥 100일을 24시간 있는 거니까, 눈뜨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자고 이랬던 게 있고. 첫 기억나는 것은 황선우 선생님이 이제 그때는 DOA(Death on Arrival; 도착시 사망 상태)라고 해서 병원 밖에서 사망한 환자가 오면 심전도 찍고 Standstill(심정지)이면 영안실로 내리는 게 관례. 다들 그렇게 했지요.


근데 황성오 선생님이 병원에 온 사망환자를 CPR을 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응급실 직원들 모두, 무슨 시체를 CPR을 하나? 그래서 시체를 CPR을 한 게, 레지던트 처음 하면서부터 그러다가 10번째인가 11번째인가? 시체가 심장이 뛰더라고. 그래서 시체도 심장이 다시 뛰는구나 이랬고.


20번짼가 됐을 때는, 아직도 이름이 기억이 나. 김XX이라는 환자인데. 원주세브란스병원하고 치악산이 꽤 멀거든. 치악산 밑에 살던 어르신인데 담배 피우다가 arrest 나서 온 환자였어요. 그때 CPR을 꽤 오래 했어요. 요즘은 20분, 30분 이런 기준이 있는데, 그때는 40분 뭐 그 정도 한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심장이 돌아와서,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3일인가? 눈을 뜨고. 한 이틀 뒤에 훅 그냥 의식이 깨끗해지더라고요. 이래서 시체도 잘하면 눈을 뜨는구나, 그 무렵의 기억 같아요.




Q 그 환자한테 감사 인사를 받으셨나요?


A 그 환자가 기억이 나는 게, 이제 궁금하잖아요? 죽었다 살아나면 뭘 보는지? 근데 본인은 죽었다 살아난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해 있어서, "어디 갔다 오셨어요? 뭘 보셨어요?" 이렇게 물어봤던 것 같아. 궁금하더라고, 죽을 때 뭘 보나. 어렴풋이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밝은 빛을 따라가는 기억이 있다고. 그래서 제가 CPR 하고 깨어나는 환자에게 꼭 물어봐. 뭘 보셨냐 이런 거.




Q 나중에 사망 체험 페이퍼를 하나 쓰셔도 되겠어요?


A 최근에 보니까 생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서울대 내과 교수인데 최 무슨 교수야. 이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시작은 영국의 소아암 교수가 애들한테 죽음을 설명해 주려고 의학적으로 시작을 했다고 그러는데, 우리나라에도 생사학 하시는 분 있어요.




안무업 선생님2.png


Q 당시 원주 세브란스에 당직실은 있었나요?


A 우리 과 당직실은 따로 없었고, 그때 의사들이 내려오면 환자 기다리는 동안에, 그때는 병원에서 담배 필 때니까, 잠깐 앉아있거나 담배 피우는 방이 작게 있었죠. 거기에 침대도 하나 있었는데, 당직 방을 안 주니까, 그때는 줄 수도 없었지. 나중에 생기긴 했는데 나중에 거기에 그냥 나 혼자 문 잠그고 다니면서 엄청 원성을 들었지.




Q 원주에 환자가 많았지요?


A 지금보다 많았을 거예요. 그때는 정리가 좀 안 돼 가지고, 늘 복도에 환자들이. 절대 숫자는 지금이 더 많을지 몰라. 근데 그때는 워낙 비좁은 응급실에, 전국이 다 그랬지요. 비좁은 응급실에 많은 환자들이 오니까. 그때 119가 없었지. 지금은 119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데, 그때는 구급차 서비스가 없었다고. 근데 원주 로터리 클럽이라는 곳에서 소방서에 구급차를 두 대 사주는 바람에 가끔씩 오기는 했어요. 고속도로 교통사고나 뭐 이런 경우에. 어쨌든 장비가 없었지. 그런 면에서 원주 인근에서 전부 오니까 상대적으로 환자가 엄청 많았지.




Q 또 그때 원주가 교통사고도 많고 사망환자도 많고, 되게 험한 병원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A 특히 교통사고가 많았죠, 여름에는 해수욕장, 겨울에는 스키장.




Q 정말 많은 죽음을 보셨을 것 같아요 초창기에?


A 어휴, 많이 봤죠.




Q 응급학과가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험한 병원은 조금 그런 걸 더 느끼지 않나요?


A 체계에 대한, 이거는 의사들만의 영역은 넘어간다는. 국가적인 시스템이 갖춰져야지, resuscitation room(소생실) 같지 않은 area에서? 이게 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피마를 새 없고, 끊임없이 들어오니까 치우면 들어오고, 치우면 들어오고. 시스템이 있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그래서 특히 임경수 교수님이 그런 시스템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고, 그때 보건복지부 찾아다니고, 소방서 찾아다니면서, 이제 미국처럼 또 유럽처럼 응급구조사의 필요성, 구급체계의 필요성을 많이 노력을 했지.




안무업 선생님3.png


Q 이제 2년 차가 되면서 아랫년차가 들어왔잖아요. 어떻게 포섭을 하셨나요?


A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지만, 나보다 늦게 한 이부수가 당연히 왔고. 3번째가 이강현 교수야. 영식이랑 같이 했지. 영식이는 서클 후배. 봉사 서클. 주로 이제 고아원 하고 홍천에 굉장히 외진 곳이 있어요. 거기 여름에 의료 봉사 가는 서클을 만들어서 같이 했었지.




Q 알아서 찾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선생님이 이렇게?


A 밑밥 던지기를 많이 했지. 이런 좋은 과가 있단다. 인턴 때도 그렇고. 근데 주로 인턴 돌 때.




Q 윗년차가 없으셔서 편하셨을 것 같아요?


A 엄청 힘들었지. 각 과하고 환자 치료에 대한 그런 게 부딪히는 게 많잖아. 그때 아무래도 담론이 딸리니까. 물론 내가 콜 하면 두 분 선생님이 언제든지 나와서 같이 환자를 봐주시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제 case by case로 저쪽은 4년 차 이렇게 오는데. 1년 차가 참 어렵지. 그런 담론이 부딪힐 때.




Q 방패막이가 없으셨군요?


A 방패막이 이런 것보다도, 이제 의사로 환자의 처치의 방향이나 이런 것을 얘기하고 싶은데, 아는 게 없는 거지. 이런 논쟁이 안 되고 무슨 말을 하는데, 특히 이제 내과의 깊이 있는 것은 못 쫓아가고 테크닉도 딸리고. 그런 데서 오는 어려움이 컸지.




Q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뭐로 공부하셨습니까?


A 틴티넬리 하나 가지고.




Q 어느 과랑 많이 부딪히셨습니까?


A 아무래도 내과지.




Q 외과 쪽은 많이 안 부딪히셨습니까?


A 외과는 이제 수술 여부만 결정하면 되니까, 그래서 외과는 나름대로 정리가 되는 거죠. 외과는 논리가 깊지 않잖아. 우리 CT 한참 할 때니까. 이미지 잘 보고. 하나 외과 쪽에서 어려웠던 것은 입원을 어느 과에서 할 거냐, 이런 게 어려웠는데. 그 당시에는 임경수 선생님이 각 과 arrange를 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리를 했었다고. 정기적인 미팅을 하고 세미나, 저널 리뷰도 같이 하면서. 룰을 좀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외과는 크게 걱정 안 한 것 같아. 그리고 외과보다는 한 1년 지나니까 우리가 테크닉이 좀 더 낫잖아, 응급실 테크닉이. 그러니까 공생 관계가 잘 형성이 됐는데, 내과가 특히 서로 어떤 decision이 다르면 (많이 싸웠지).




Q 초창기 학회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학술 대회를 원주에서도 하고 그랬죠?


A 원주에서 내가 1년 차 때인가 했고, 내 첫 학회는 픽스턴을 뽑는다고 그래서. 응급의학과 픽스턴을 하기 시작했는데, 24시간 근무를 했단 말이야 매일. 임경수 선생님이 이렇게 보시더니, 학회를 가자 그러더라고, 픽스턴 돌고 있는데. 인턴 끝무렵이지, 레지던트 시작 전에. 그때가 카대에서 한 거야. 어떤 홀 빌려가지고. 그때 학회를 처음 갔고.


그다음에 장소를 옮기면서 하는데, 그때 학회가 전부 어르신들이 다 모이면 한 15, 20명 정도 모여. 그러면 우리가 장석준 선생님, 최옥경 선생님, 나, 박규남, 이원재. 근데 박규남, 이원재는 잘 안 왔고. 장석준 선생님하고 나하고 무슨 학회 간사 비슷한 것을 한 것 같아. 그래서 김승호 선생님하고. 하여튼 학회 궂은일을 많이 하셨어, 김승호 선생님이.




Q 초창기에 제약회사에 전화하고 직접 다 하셨겠네요?


A 아니야, 그거는 철저하게 이한식 선생님하고 김문수 선생님하고만 했어. 그리고 임경수 선생님이 많이 했고. 그리고 황정연 선생님이 좀 도와줬고. 근데 김세경 선생님은 잘 모르겠어. 근데 모이면 임경수 선생님이 제약회사 한 둘 책임지고, 세브란스에서 아무래도 주로 했지 병원이 크니까.




안무업 선생님4.png


Q 최옥경 선생님이나 김성중 선생님은 치악산 앉은뱅이 술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요. 원주가 술을 제일 많이 마셨나요?


A 그런 것도 있었고. 우리 여의도에서 만났을 때, 그때 이제 무공 내기를 했잖아. 근데 황성오 선생님의 덕이 컸지. 사실은 응급의학과의 많은 술기들이 대부분 카디오 술기들이 많다고. CPR부터, 센트럴 라인 하는 것부터, 그런 중환자 치료하는 테크닉이. 보통 내과는 1년 차가 되면 뭘 가르쳐준다, 2년 차가 되면 뭘 가르쳐준다, 뭐 이런 게 있는데. 그거를 거의 1년 차 때 초기에, 레지던트를 시작하자마자 황성오 선생님이 쇽(shock)이라는 책을 주더라고. 월요일 날 주고 토요일 날 오전에 그걸 발표하라는 거야. 대충 발표하면 되는 줄 알았지. 그래서 엄청 혼나고. 일주일 만에 그것을 어떻게 해, 못 하지.


그다음부터는 밤새워서 공부해서 그거를 겨우 떼니까 바로 센트럴 라인을 가르쳐주더라고. hemodynamic(혈류 역학) 공부를 해주고. 좀 지나니까 정남식 교수가 에코(Echocardiography; 심장 초음파) 책을 하나 주더라고. 그거를 공부하라고 해서 했더니 바로 에코 가르쳐주고. 그랬더니 임경수 선생님이 소노(Sonography; 초음파) 책을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6개월 만에 되게 빨리 배운 것 같아.


그러니까 응급실에 타과 레지던트들이 CT 찍기도 전에, 임경수 선생님이 FAST(Focused assessment of sonography for trauma; 외상 초음파)의 개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면 보고 바로 피가 있으면 바로 외과 불러라. 그리고 요즘은 CT가 빠른데, 그때는 CT 한 번 하려면 1시간씩 걸리니까. 타이밍 놓치지 말고, 쏘노해서 있으면 바로 수술 올려라. 이런 거를 많이 했지.




Q 당시 에코나 쏘노라면, 내과나 영상의학과랑 좀 트러블이 있을 만도 한데요?


A 근데 황성오 선생님이 그때 심지어는 코로나리(coronary; 심혈관조영술)까지 했다고. 워낙 황성오 선생님이 내과 하고 관계를 잘 맺어서, 응급실에 오는 카디오(cardio; 심장) 환자는 황성오 선생님이 해결한다. 그리고 본인이 실제로 밤에도 다 나와서. 그래서 내과 애들이 안 나와 주니까, 내가 줄 닦으러 올라가고. 그래서 코로나리까지 했지. 두 분 선생님이 많이 정리를 해두셔서.




Q 당시에 초창기부터 10년 넘도록 원주가 파견을 제일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A 그래서 센트럴 좀 배우려고 온 거야. 에코하고. 그래서 옥경이도 오고 장석준도 오고. 근데 배우라는 것은 안 배우고, 술만 잔뜩 먹고 갔지.




Q 다른 병원에서 상당히 많이 부러워했을 부분인 것 같아요.


A 학회 가면 아직까지는 원주가 술기면에서는 좀 세지 않나?




Q 논문 많이 쓰셨죠? 어떻게 쓰셨어요?


A 내가 레지던트 때 13개를 썼다니까. 일단, 내가 디자인해서 쓴 거는 disaster 쪽으로.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 다닐 때, 컴퓨터를 좀 했어요. 그래서 데이터에 개념이 좀 있었지. 두 분이 처음에는 큰 기대 안 하고 DB 정리를 해보라고 그러더라고. 환자 이름 막 쓰는 거 3장, 4장짜리 주잖아. 거기에다가 환자들 오면 데이터 채워라. 황성오 선생님은 CPR 쪽에 5장인가, 6장인가. CPR 오면 다 채우는 거지.


두 분이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두 분이 스터디 개념이 있어서. 페이퍼 시트가 굉장히 정교했어. 그래서 resuscitation 쪽은, 오면 그걸 계속 쓰면, 데이터를 모아가면서 계속 이제 페이퍼가 나오는 형태지. 임경수 선생님도 shock이랑 trauma에 대해서 시트가 포맷화 된 게 있었다고. 그래서 의국에서 데이터만 잘 관리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그때 한 달에 두 번 정도 두 분한테 데이터를 중간중간 통계를 내가 좀 할 수 있어서, 기초 통계를 두 분한테 늘 보고를 하면, 이 주제로 이렇게 써보자.




Q 말은 이렇게 쉽게 하시지만, 데이터 관리가 막노동이잖아요?


A 근데 그때 그건 좀 재미있었어. 데이터 관리하는 게 재밌더라고. 나도 좀 써보고 싶다 그래서 쓴 게, 첫 논문이 재미난데. 토요일마다 저널 클럽을 했단 말이야. 토요일 날 아침에, 밴쿠버에서 로프가 끊어지면서 떨어지고 어쩌고저쩌고 한 저널 리뷰를 발표했는데, 그때 아시아나 항공이 떨어진 거야. 그래서 이게, 곤돌라가 몇 개 떨어져도 논문을 쓰는데, 저걸 가서 조사해보면 재밌겠다. 그래서 임경수 선생님한테 갔다 오겠다고 그랬더니, “야, 그거 환자 벌써 다 처치하고 네가 할 일 없어”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논문 한 번 써보려고 간다고. 그랬더니 갔다 오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보름 걸렸어요, 환자 다 만나는데. 가니까 환자들이 막 흩어져 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데이터 모으는 게 참 오래 걸리더라고. 보름 만에 갔더니, 나 도망간 줄 알았다고.




안무업 선생님6.png


Q 사실 안무업 선생님 하면은 외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미국 가셨던 얘기를 좀 해주시죠?


A 그때는 틴티넬리에 나오는 용어들이 너무 생소한 거야. 그래서 이 개념 자체가 이해 안 되는 게 너무 많은 거야. 그때 마침 모든 국민이 외국에 나갈 수 있게 됐어. 88 올림픽 전에. 그래서 미국을 갈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비자 신청을 했지. 한 달 뒤에 나오더라고. 마침 휴가 기간에 딱 됐어. 그래서 이제 무작정 뉴욕을 갔지. 뉴욕에 가서 호텔 이런 것은 너무 비싸고. 공항에서 자면서, 거기서 버스를 타면 뉴욕 무슨 병원 근처에 내려줘. 가서 응급실 앞에서 하루 종일 구경하는 거지. 대기실에도 있다가, 허술하면 안으로 들어가 보고. 권총 찬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뭐 하는지도 좀 보고. 안 되는 영어로 물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개념을 잡게 됐지.




Q 응급의학과 의사랑 대화도 좀 해보셨나요?


A 뭐, 이렇게 “한국의 의사인데, 우리는 아직 응급의학과 의사가 없다.” 내가 응급의학과 의사라고 말할 수는 없었고. 응급의학과 의사가 뭘 하냐 물어봤더니. 레지던트가 몇 개 설명해 주고.




Q 어떻게 보면, 지금 후배들이 1년 연수 간 것보다, 그때 간 1주, 2주일이 더 인상 깊으셨을 것 같아요.


A 아, 그니까 해결 안 되는 개념이 이해가 된 것이. 그러고 나서 임경수 선생님이 우리나라 상황은 미국 응급의료 체계가 아니라 일본식 응급의료 체계가 우리 현실에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본의 기타사토 대학. 응급실을 열심히 키우는 그런 병원. 사실 그 모델을 보고 카디오(cardiologist; 심장전문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고. 그때 참 여러 가지 어려웠을 텐데, 일본을 보내주셨지. 그래서 그때 2, 3달 있었던 게 완전히 2년 차 때 일본을 다녀온 게 정립이 딱 되는.




Q 미국이나 일본의 응급실을 보셨을 때, 많이 부러우셨겠어요 선생님?


A 한 마디로 얘기하면, 일본 갔다 와서 임경수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우리 생전에 저런 응급실을 만들 수 있을까. 특히 그때 우리 모델은 기타가토 응급센터 같이 만드는 거였지. 근데 딱 15년 걸렸지. 원주가 지금은 더 낫지.




Q 어떤 면에서 더 낫다는 거죠?


A 일단은 이제, 우리가 이쪽 응급센터랑 외상센터랑 이것을 같이 하는 체계지. 내가 여기서 좀 낫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가 일본보다 낫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벤치마킹했던 그 일본 응급센터보다는 원주의 응급센터가 조금 더 낫다.




Q 사실 30년 동안 처음부터 다 보셨잖아요. 그렇게 빨리 발전할 수 있는 원인은 뭐였을까요? 희생? 열정?


A 파운더(founder; 창립자)들의 결심이 일단은 중요하고. 파운더들이 응급의학과를 만들어야겠다는. 그분들이 용기 있게 시작한 게. 그때 응급의학과를 만들려는 노력이 몇 군데 있었어요. 특히 이제 유럽식으로 구급 의학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는 마취과 의사들이 이제 구급 의학 현장에 나가는 역할을 하잖아. 그니까 우리나라 마취과 의사들도 유럽식의 응급의학과를 만들어 보자.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먼저 시작을 했고. 가정의학과도 나름 이제 한다고 움직임이 있었다고. 그런 가운데, 우리 파운더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해낸 게 있고. 그리고 시대적 요구 사항도 간과 못하지. 연탄가스도 연탄가스지만, 교통사고 사망률이 엄청나게 올라가면서, 사회적으로 응급의학 체계가 없으면 너무 불안정하다, 이런 사회적 needs가 있었고. 그리고 특정 분들을 말해서 좀 미안하지만, 임경수 선생님하고 황성오 선생님이 법이 있어야 된다고. 국회의원하고 복지부하고 설득을 해서 법을 만든 게, 법이 딱 되니까 하루하루가 눈 부시게 달라지더라고.




안무업 선생님5.png


Q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과정에도 관여를 하시지 않으셨나요?


A 관여를 했다고 하는 건 좀 그렇고, 그냥 파운더 선생님들 복사해드리고. 실무적인 일들을 하고. 마침 임경수 선생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원주 근처에서 작업들을 하니까. 그런 일을 도와드리고, 부족한 부분 자료를 찾고 그런 일들을 했었지.




Q 4년 수료를 하시고서 바로 전문의 시험이 없었잖아요. 서운하셨겠어요?


A 성격상인지는 모르지만, 뭐 안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고. 한 해 늦는가 보다.




Q 별로 아쉽지는 않았나요?


A 그런 건 진짜 없었던 것 같아.




Q 그럼 나중에 전문의 시험 생겼다고 하니까 뭔가 있으셨겠어요?


A 그것도 또 반대야. 이 서운함이 좀 있었어요. 그땐 아마 어려서 그런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이 다 학회에서 여러 일들을 하시면서 큰 도움이 됐는데, 그 당시에는 나름 이제 무임승차한다는 분들이 너무 오시니까. 좀 서운하더라고. 정말 애쓰신 분들이 있고, 안 좋은 상황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있는데.




Q 수련 없이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신 분들에 대한 어떤 서운함이 있으셨겠네요?


A 그렇지, 이제 어떤 기여한 부분이 없이. 그러니까 파운더분들이야 응급의학을 만들어야겠다면서 본인의 전문 영역을 포기하시고, 그런 기여한 부분이 있잖아. 레지던트들 가르치고 교육시키고. 진짜 무지막지한 무임승차들이 오는데,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이 제일 문제야.


그때 각 대학에서 특히 외과 쪽에서 컴플리케이션(complication; 합병증) 많이 만들고 골치 아픈 친구들을 응급실로 쫓아 보냈다고. 외과에서 쫓겨나고 나서 갈 곳 없으니까, 응급실에 있고. 응급실에 그냥 있는 거지. 그런 양반들이 큰 뜻이 있었다고 이런 식이고. 그리고 레지던트들도 몇 명이 응급실에서 당직 의사 하면, 내과나 정형외과 같은 곳 가는데 가산점 준다고 응급실에 있었던 애들이 있었어. 당직 의사로 있으면서 그냥 레지던트 이름 걸고 있는 거지. 수련도 아니고 그냥 일하는 애들이. 근데 이제 나도 트레이닝한 거라는 식으로.




Q 10주년 기념 책자를 보니까요, 선생님 이름도 나오시고. 전공의들과 스텝들과 수련의사와의 회의록이 실려있는데, 말은 굉장히 순화되어 있지만, 긴장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A 그런 얘기를 많이 한 게 아니라, 치열하게 했지. 전문의가 생긴다 안 생긴다 보다는 그 과정을 지키고 싶었지. 그렇게 들어온 많은 분들이 또 역할을 하신 분들이 있고. 역시나 골치 아픈 사람이 여전히 있고 그래. 그래서 그런 게 부정적인 측면을 걱정한 거지.




Q 초창기에는 사실 그럼 전문의 시험이 있고 없고 가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군요?


A 그렇지.




Q 근데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1, 2, 3, 4, 5기 넘어서까지 중간에 그만두신 분들이 한 분도 없으세요?


A 그랬나? 아니야 있어. 기록에 안 남아서 그렇지. 일단은 부산 침례 병원에 1기로 한 분 이제, 나랑 비슷할 때 하신 분이 있어. 이승환이 말고 이승환이 위에 있다고. 거기 친구가 하다가, 거기가 황정연 교수인가? 부산 침례에 있다가 의료원으로 와 버렸어. 근데 이 친구들을 안 데리고 오니까, 선생님이 없어진 거지. 그래서 다른 데로 이승환이는 받았는데, 안 가고 포기한 친구들도 있어. 나이도 많고 안 받아주니까.




Q 전문의 되시고 나서 처음 어디 계셨나요?


A 여기 있었죠. 바로 이쪽에.




Q 그 당시에는 응급의학과가 여기 없었죠?


A 없었죠.




Q 이 병원에서 응급의학과를 인지하고 있던가요?


A 모르지.




Q 모르는 과를 신설하시는 게 참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A 쉽지 않았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니까 큰 기대가 없으니까. 그냥 하자 이런 것도 있었고.






Q 30년 동안 응급의학과가 쭉 발전을 해왔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어떤 우리가 나중에 이렇게 만들어야지 하는 꿈과 희망의 반쯤 왔나요 지금?


A 레지던트 하고 그러면서 짧은 기간에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웠지. 내가 정말 에코를 잘했어. 내과 애들보다 잘했다고. 근데 운이 좋아서, 이 병원에 오자마자 쏘노 좀 사달라. 그래서 병원에서는 왜 응급의학과에서 왜 에코, 쏘노를 사달라고 그러냐. 그거 사는데 내가 12년 걸렸어 우리 응급실에. 응급실에서 할 게 없으니까 사람 미치겠더라고. 그게 이제, 여기 와서 힘들었던.




Q 근데 어떻게 처음 자리를 잡으셔서 계속 여기 계셨네요?


A 개인적으로 좀 고민스러웠던 곳은 사실 모든 대학 출신들이 다 그렇지만, 자기 모교를 가고 싶잖아. 나도 그런 생각으로 여기 와 있었는데, 느닷없이 거기도 함 찾아봐 봐. 부천 세종 병원에서 응급의학 하던 친구들이 있었어. 거기 CS 하던 양반이 응급의학과 트레이닝을 했었다고. 거기 4명인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가 춘천고등학교 출신이고 내 후배야. 한림대학교 나오고. 그 친구가 여기 와서 레지던트를 하고 싶다는 거야. 고민을 많이 했지. 저 친구를 받으면 나는 이제 못 간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친구가 너무 원하고. 고민하다가 눌러앉기로 했고. 한 번 눌러앉으니까 다른 데 가고 싶지도 않더라고.




Q 아마 교수님께서는 전공의 하시면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보셨을 것 같아요?


A 지금까지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Q 다시 응급의학과를 하라고 하시면 하시겠습니까?


A 다시 하되 다른 방법으로 하고 싶어. 그니까 field emergency(현장 응급)를 먼저 해보고 싶어. 그때는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공부한다는 생각을 못 해봤기 때문에, 나는 이제 기초 학문적인 쪽은 아닌 것 같고. 응급의학과 의사로서는 field emergency를 한 번 해봤으면 좋았겠다 이런 생각이 있어.




Q 그럼 응급의학을 다시 하되, 외국에서 하시고 싶다는 거죠?


A 아니. Field emergency를 해보고 싶다. 재난 현장에 있는 의사라든지 이런 데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의사를 했으면 좋았겠다.




Q 아주 친한 가족이나 후배가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그러면, 말리시겠습니까?


A 나는 사전 질문이 있을 것 같아. 나는 Why가 더 중요한 것 같아. "왜 의사가 되고 싶었니"에서 답이 응급의학과와 맞으면. 예를 들면, 생명을 소중히 한다든지. 응급의학과의 특성이 그 이유와 맞으면. 근데 예를 들어서 사실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거든. 가족과 알콩달콩 산다거나, 큰돈을 번다거나. 근데 Why가 그거인 친구들은 (응급의학과 하기엔) 좀 생뚱맞지.




Q 응급의학과가 멋있는 과인 가요?


A 멋에 대한 정의가 중요할 것 같은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멋보다는 의미. 의미로 친다면, Why를 먼저 생각하는 게 옳고. 그다음은 How로서 그 의미를 응급의학과 의사를 통해서 성취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Q (전문의) 2000번이 나왔잖습니까. 2000번한테 이야기를 해준다면? 올해 1년 차한테 어떤 얘기를 해주셨습니까?


A 입국식 있는 날에 4년 차가 나가야 되는데, 이 친구가 군대를 안 가게 된 거야. 그래서 응급의학과 의사로 어떻게 사는 게 좋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돈도 좀 벌고 싶고, 의사로서 테크닉도 잘 유지하고 싶고. 여러 가지를 말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1년 차들한테 그런 생각을 해보라는 건데. 의사로서가 아니라 자기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요즘 애들 소확행처럼 돈 적당히 벌어서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것도 정말 의미 있는 거거든. 그리고 의사 잘 만 하면 돈도 벌 수 있잖아. 아니면, 어떤 애들은 학문이 재밌다는 친구들은 교수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아예 환자 안 보는 연구 의사가 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지금 1년 차 애들한테는 응급의학은 이미 선택을 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10년 뒤, 20년 뒤 내가 어떻게.




Q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살고 싶은 인생을 지금 만들어 오고 계신가요?


A 나는 본과 3학년 때, 교과서에 한 줄 한 줄이 되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 한 줄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더라고. 그래서 진짜 한 줄 쓰고 싶었어. 그래서 원주에서도 책 냅시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두 분 선생님한테 부탁했어.




Q 응급의학의 장단점은?


A 장점은 나 이거 미국에서 은퇴를 한 달 앞둔 의사한테 들은 얘기인데. 우연히 뉴욕에서 만났어. 우리가 이제 의료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아는 척을 하더라고. 무슨 과냐고 물어봐서 emergency라고 하니까 자기도 그렇다고. 그래서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스토니브룩에 있다는 거야. 자기 은퇴 한 달 남았데. 응급의학과 의사는 은퇴가 없잖아요 그랬더니. 근데 은퇴하고 싶다는 거야. 그분이 하는 얘기가, ‘Everyday new patient, everyday new day’ 내 인생이 늘 새로웠다. 정말 멋진 말이다. 매일 새 환자를 보니까, 매일이 새롭고. 그래서 내 인생은 늘 새로웠다.




Q 나쁜 점은 뭔가요?


A 나쁜 점은 잘 모르는데, 내 주변을 보니까 나 스스로도 그런 것 같아.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니까 일정한 시간에만 보니까 자기를 잘 단련하지 않으면 게을러질 수 있어. 그런 애들을 많이 보고. 외과나 내과나 보면, 환자가 다음 달에 날 찾아오고 그러니까 게을러질 수가 없어. 근데 응급의학과 의사는 잠깐 보니까 슬쩍 좀 게을러지는 친구들이 있어.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수련이 필요한 과에요.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

https://youtu.be/kUyoqRTj1PI

keyword
이전 06화유수진 응급의학과 1회 전문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