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이야기 150821] 아이들을 키우면서 #2
아이가 아파서 병원 응급실로 오게 되면, 보통 엄마가 증상을 설명하고 아빠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이유로 엄마가 병원에 방문하지 못하고 아빠만 아이와 함께 오게 되면, 아이 체중이나 예방접종 과거력, 투약한 약 종류나 과거 병력 등 여러 가지 정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 직접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해야 정보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에 대해 잘 모른다 할지라도 마음까지 그와 같진 않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 때문에 아버지께서 많이 놀라셨던 일이 생각나네요. 초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 온도계가 뚜껑에 붙어있는 필통을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은주가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 냉장고에 넣었다가 이불 속에도 넣었다가 하며 놀았었죠. 그러다 온도계 안에 들어있는 물질에 대해 궁금해졌었나 봅니다. (사실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온도계를 깨서 그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맛보고 동생에게도 맛 보여주던 중, 부모님께 발견되어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맛이 생각나네요, 왁스 맛이 났었는데 말이죠. 그때, 아버지께서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았던 것이 생각납니다. 평소 말씀은 잘 안 하시지만 아들이 잘못될까 많이 걱정되셨던 거겠죠.
결국 응급실 담당의 선생님은 이 물질이 수은인지 아닌지 확인이 어려우니 일단 위장관 세척을 하자 결정하였습니다. 다행히 학용품인 필통에 수은이 들어간 온도계를 썼을 가능성은 적다는 이유로 퇴원을 하긴 했는데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날 그 응급실은 위세척을 받는 두 명의 어린이 덕에 적잖이 시끄러웠을 겁니다. (그 응급실이 제가 커서 레지던트 수련 받은 병원 응급실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그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아서일 뿐 아빠의 마음도 엄마의 표현만큼이나 아플 겁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아빠가 대여섯 살 된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왔습니다. 아이가 보조석에 앉아 있다가 잠깐 안전벨트를 푼 사이, 앞 차량의 급정거에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유리창에 머리가 부딪혔고, 유리가 깨져 금이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마에 특별히 부종이나 상처는 없었고 잘 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리가 깨질 정도의 둔상이 있었고, 얘길 들어 보니 내원 직전에 구역질을 한 번 했다고 하여 의료진 입장에서는 마냥 괜찮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환자의 경우 검사를 과하게 요구하거나 무조건 입원을 시켜 달라고 조르는 일이 종종 있어서, 이번 경우도 아빠가 아이의 사고 상황을 좀 과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선입관을 저도 모르게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일단 원칙대로라면 구역질이 있었다고 하니 머리 CT 검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걱정되시면 일단 아이를 수면제로 재우지 말고 그냥 CT 확인을 시도해 보자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후 영상의학과에서 아이가 울면서 심하게 움직여 촬영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응급실로 돌아온 아빠에게 아이를 재워서라도 CT 확인을 하실지 물었고, 그러겠다고 하시기에 전 퉁명스레 “그럼 찍어 봅시다.” 하고 아이에게 시럽으로 된 수면제를 처방했습니다. 이후 다른 환자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중, 아빠는 아이가 자지 않는다고 다시 저를 찾았습니다. 수면제를 추가로 사용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이는 잠이 들어 CT실로 옮겨졌습니다.
어렵게 확인한 머리 CT 검사에서 다행히 특별한 뇌출혈 소견이나 골절 소견은 없었습니다. 저는 깊게 잠이 든 아이 옆에서 늦은 저녁 삼아 빵을 먹으며 결과를 기다리던 아빠에게 다가가 짧게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다고...
그러자 갑자기 아빠가 먹고 있던 빵을 입에 문 채 엉엉 우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제야 전, 세 시간에 걸친 긴 기다림 동안 이 분이 ‘내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냥 ‘CT 찍어 보고 싶으면 찍어보세요’ 하는 무책임하고 교과서적인 말만 해 놓고, 아이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하는 그 흔한 말조차도 없이 사무적으로 보호자를 대한 것이었지요.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제야 전 얘기했습니다.
아이가 괜찮으니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하셨나 보네요.
부끄러워 더 이상의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습니다.
응급실 의료진은 다양한 아픈 환자와 다친 환자를 만납니다. 많이 만난다는 것은 경험이 쌓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익숙해지고 나면 때로는, 그 환자의 고통이나 불안감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가운 의사’, ‘차가운 간호사’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의료인이 아닌, 환아의 아빠의 마음으로, 환자의 남편의 마음으로 진료하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것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우리 의료진에겐 더욱 필요해 보입니다.
150821 최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