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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Dec 25. 2021

자전거 처음 타던 날

플로깅 열여덟째날 

눈 내리고 갠 날. 날은 춥지만 청명한 하늘이 기분좋다. 미세먼지(PM10, 머리카락굵기 7분의 1) 초미세먼지(PM2.5, 머리카락굵기 28분의 1)가 없어서 밤하늘이 투명하다. 몇 달전에 해처럼 동에 뜨고 서에 지는 달이 몇 시에 뜨고 몇 시에 지는지 딱히 이유없이 궁금해졌다. 앱(Sun Position Demo)을 깔았다. 외국앱인데 위도를 설정해놓으니 월출 월몰 시각을 알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이후 몇 번 안 들여다봤다. 용하다는 타로 앱을 깔아두고서 잘 안 보는 것과 매한가지.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좋다. 공동주택 창밖의 보름달(이제 보름서 하루 지났지만)이 무척 신비로워서 한 컷 찍고서, 밤에 플로깅에 나선다. 


  



가로등이 워낙 밝긴 하지만 보름달 딱 하루 지난 날이라 그런지 길이 훤하다. 나오자마자 흰 마스크를 발견. 집 오른편 골목에도 또 하나,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오니 또 하나가 떨어져 있다.(마구 버려져 있다.) 한 30미터 걸으면 우리집 앞 쓰레기터말고 또 하나의 쓰레기터가 있는데, 여기를 중심으로 골목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마스크 세네개를 발견. 흰 마스크 쓰레기를 그야말로 줍줍했다. 그러고서 보니까 주변에 병유리조각이 위험하게 흩어져 있다. 주은 마스크에 곱게 유리조각을 싸고 갖고 나간 종이와 비닐로 꽁꽁 싸매놓는다. 유리조각이 집게로도 잘 집어지지 않아서 장갑낀 손으로 조심조심 집었다. 


골목 쓰레기를 찍은 사진에 필터 적용해서 이쁘게 꾸며보았다. 아뉘, 쓰레기 사진을 꾸미고 있다니 아티스트가 된 거야?! 플로깅을 하다 보니까, 나름대로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골목에서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자전거를 배우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한 손녀가 할아버지와 함께 초저녁에 골목에 나와서 자전거를 배우는 것 같았다. 골목이라 해도 오가는 차량이 정말 많은데, 아마 팬데믹으로 학교 운동장 등이 폐쇄되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골목에서 자전거를 배우던 듯 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뒤에 안장을 잡아주고 차 오가는 것도 봐주고 하시더니, 몇 번째 보니까 소녀가 제법 실력이 늘어 있었다. 그전에 봤을 때처럼"할아버지 잘 잡고 있어?"하고 묻지 않고서, 균형을 잡고서 잘 타고 있었다. 


나도 초등학생 때 자전거를 무척 배우고 싶었는데, 집에 자전거가 없었다. 어떻게든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자주 가던 단골인 만물 슈퍼 가게 아저씨의 자전거가 생각이 났다. 아저씨는 배달물품(쌀 같은 거)이 있을 때 자전거를 이용하셨는데 학교가 마친 오후에는 별로 손님이 없어서 항상 자전거가 놀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가서 한 일이주일만 오후에 한 두시간 정도 저 좀 자전거 빌려주시면 안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열망이 지대해서였는지 어린 나이에 별로 부끄럽지도 쭈삣거리지도 않았다. 초등학생 고학년이라 해도 체구에 비해 무척 큰 배달용 자전거인데 괜찮겠느냐고 아저씨가 묻더니 자전거 바퀴에 펌프를 넣어주셨다. 그때부터 한 일이주일이던가 한달이던가 아마도 한달 정도나 ㅎㅎ 학교가 끝나면 곧장 슈퍼에 달려가서 자전거를 끌고서 학교 운동장에 갔고 금방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당시(초등학생 때)에는 솔직히 '난 단골이니까 아저씨가 이 정도 인심 써주시는 게 당연하지' 하면서 철없는 자부심이 쩔었는데, 돌이켜보니 아저씨가 참 마음이 넓은 분이다. 단골이라 해도 매일 꼬마가 사는 게 과자 한 봉지 정도였을 건데...(것도 매일도 아니고 이틀 사나흘에 한 번이니까 ㅎㅎ 그래도 과자를 사먹을 때는 친구들 끌고서 만물 슈퍼로만 다녔다) 가게 아저씨 생김새도 목소리도 다 잊어버렸지만 관대함이 멋진 분이었다. 이 글을 쓰다보니, 플로깅을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골목에서 소녀가 자전거를 타기 전에 유리조각 같은 거 다 치워줄 수 있었을텐데, 올 여름 가을에도 유리조각이 많았겠지 싶다. 아무런 댓가 없이 크고 작은 친절을 나눠준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오늘의 정리 

마스크와 유리병조각을 줍고서, 요새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쓰레기 아이스팩도 하나 주워서 또 수거함에 갖다 놓았다. 버려진 마스크는 정말 그만 줍고 싶다. 이제 보름달 지고 그믐달 되니까 흰 마스크가 더 내 눈에 안 띄기를 ㅎㅎ. 자꾸 생각하니까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앞으로 쓰레기 사진을 어떻게 꾸밀지 어떻게 의미 있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오늘 플로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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