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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호 작가 Dec 13. 2022

총량의 법칙

한라산 후기/아버지 병문안 후기

지난주 한라산을 나와 함께한 한분이 있는데 와이프의 친한 친구의 아버지이다. 성판악에서 새벽 5시에 만나 뵌 아버님은 46년 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데 등산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결국 나이가 제일 젊은 79년생 내가 꼴찌, 70년생 선배가 두 번째, 46년생 아버님께서 우리 중에 제일 먼저 백록담을 오르셨다.

산은 참 공평하다. 평소에 자신의 몸을 얼마나 단련했는지 또는 방치했는지 자명하게 보여 준다.


산을 걸으며 아버님께 물었다.

"아버님 인생을 살아 보시니 제일 중요한 게 뭔가요?"

아버님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라 하셨다. 친구? 관계? 정말?


저 나이쯤에는 너도 나도 건강 생각만 하는 줄 알았는데... 친구라니.. 살짝 의외였다.

뭐든 내가 생각한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알아차렸다.


친구 아버님은 젊어서 공사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느라 놀아 본 적이 없다 하셨다. 젊어서는 술도 먹지 못했고,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지금은 여러 모임에 나가서 술도 곧잘 드신다며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이 많이 변했는지 '껄껄껄' 웃으신다. 그리고, 모임에 속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시는 것 같아 보였다..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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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사이에 네 번째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역에 내려 중형차를 렌트하고 아버지 병원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12시에 만나기로 했고 11시 50분쯤 전화를 드렸는데 날도 추운 오늘 아버지는 벌써 1층에 내려와 있으시단다. 갑자기 가속페달이 막막 밟아진다. 에휴.. 날도 추운데.. 뭘.. 이렇게 빨리 내려와 있으신 거야~!


서울역 빵집에서 산 에그햄샌드위치와 200ml서울우유를 뒷좌석으로 건넸다. 순간 병원 앞 큰 길가에서 급하게 차에 아버지를 태우느라 인사도 못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그냥 40대 아들과 70대 아버지의 식상한 인사다. 신장이 망가져 혈액투석을 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가장 몸에 덜 해로운 샌드위치로 샀다는 걸 마음으로 전했다. 집에 모실 형편이 되지 않음이 자식으로서 마음에 걸린다.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KTX  타고 내려와 가끔 점심 사드리고, 대학병원 외래가 있으면 모시고 가는 게 할 수 있는다이다.


아버지는 한 달 전 심장과 폐에 갑자기 물이차 응급입원을 하셨다. 간병인을 붙일 정도는 아니였고, 난청이 심하셔서 의사소통이 안되는게 문제라 내가 2주간 아버지 옆 간이침대생활을 자처했다. 난 앞서 말했지만 효자는 아니다. 단지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아버지와 2주간 뭔 할 말이 있겠는가? 일상이 그냥 무료했는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를 그냥 두긴 그래서 가끔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보증 잘 못선 이야기... 학창 시절 야구선수 이야기...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을 물으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 담배 한 것'이라 하신다. 그리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으니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니 낳았을 때"라 하신다.. 마음은 솔직히 울고 싶었는데 애써 아닌 척했다. 아픈 아버지 앞에서 나이 사십먹은 아들이 질질 짜는 것도 보기 안 좋고 2주간 간병해준다고 고마워서 다분히 의도가 들어가 답변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야구 선수였다. 운동선수들 특징 중에 술을 말술로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전자에 속했다. 90 kg이 넘는 몸에 아버지와 함께 운동하셨던 친구들과 만날 때면 소주 두 박스를 안주 쟁반 밑에 쟁겨 놓고 드시고는 했다. 옛날에는 슈퍼에서 500원 1000원 주고 소주박스 맥주 박스를 같이 줬었다. 거기 위에 안주 쟁반을 올려놓는 거다. 소주 두 박스를 갈아 치우면 맥주 두 박스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다. 하지만, 다들 총량이 있는 법 아버지의 술 총량은 40대에 끝이 났다. 당뇨병이 생기고도 10년을 술 담배를 함께 하셨으니 총량이 더 빨리 채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건강"이지 않을까? 이건 또 이기적인 내 생각에서 비롯된 답변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보다 5살 많으신 분과 한라산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1등으로 오르셨다고도 말씀드렸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조금 더 첨언했다. 젊은 시절 일만 하시다가 지금은 여기저기 다니시며 여가를 즐기신다 했더니 아버지께서 "늦바람 들었구먼"하신다.


늦바람.. 늦바람.. 늦바람의 반대말은? 뭘까?바람?

앞바람들어 장성한 아들 둘과 소주잔 한번을 기울일 기회를 주지 않으신 아버지가 원망 스럽기도 했다가 저렇게 위트 있는 말씀하시는 정신이라도 있으셔서 다행이라며 생각을 고쳐 먹는다. 팔이 이상하게도 안으로 굽는 느낌이다.


다들 저렇게 각자의 재각각의 총량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아이의 징징거림도 애 엄마의 분노의 샤우팅도 일도 명예도 생명도 다 총량이 있다.


아버지 저는 건강할 거예요. 건강을 잃는 총량은 제일 마지막에 채우고 싶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내 새끼들 잘 되는 거 보고 손주 손녀들이 잘되는 것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큰 길가에 급하게 아버지를 내려 드리고 렌터카를 반납하고 헐레벌떡 뛰어와 기차에 앉아 문자로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서울 부산을 한 달에 몇 번씩 오가는 게 힘이 들고 돈도 들지만 아직 건강하고 돈이 부족하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


그리고 덜컹거리는 기차칸 선반 위에 보기만 해도 흐뭇한 도넛츠 3박스가 있다..이른 새벽 부터 나와 아버지 봉양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지만 지 새끼 간식은 또 기똥차게 찾아 기차에 같이 실었다. 덕분에 뛸수 밖에 없어 숨이 가쁘지만 행복하고 감사하다.

 

여러분은 어떤 총량을 빨리 채우고 어떤 총량은 가장 천천히 채우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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