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정 에세이
책 제목: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저자 : 임희정
출판사 : 수오서재
최근에 ‘부모-자식’ 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연달아 읽었다. 프랑스 작가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과 박지리 작가의 <맨홀>을 읽은 후, 이 책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만났다.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에서는 부모님의 이혼 후 엄마와 아빠의 집을 번갈아 오가며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었던 소년을 만났고 박지리 작가의 <맨홀>에서는 16명의 목숨을 구하고 순직한 명예로운 소방관 아버지, 하지만 실상은 술 먹고 가정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매를 만났다.
앞서 만난 두 소설 속 부모님들에 비해 이 책에서 만난 저자의 부모님 두 분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부모님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저자의 부모님은 '그 자체로' 훌륭하신 분들이셨다. 교과서에 나올 만한 큰 업적이나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기도 하지만,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이라고 고백하는 딸을 키워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을 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임희정 작가의 아버지는 건설노동자셨다. 단 한 번도 일을 ‘막’ 한 적은 없지만 막노동이라고 불리는 일을 50년 넘게 이어오신 일용직 노동자시다. 어머니는 결혼 후 줄곧 전업주부로 사시며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을 아끼는 것으로 돈을 버셨다. 사실 편협한 생각으로는 앞서 만난 두 소설 속 가정환경에 비하면 경제적 여건의 부족은 그나마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저자는 가난으로 인한 고생 앞에서는 여러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지만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깊은 감사와 애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함 없는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꽤 밉고 아픈 상처였다. 처음 학교를 다닐 때부터 졸업 후 떳떳하게 자신의 명함을 가지고 일하던 때에도 이따금씩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번듯하게 잘 자란 자식을 보면서 사람들은 부모의 인품이나 교육방식을 궁금해 하기보다 부모의 직장과 학력을 궁금해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버지의 직장과 직업을 서슴없이 물었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가난 앞에 수없이 작아졌던 마음의 응어리는 무례한 질문 앞에 더 작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포장해야 할지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아 수 없이 갈등했던 순간, 저자는 명확한 대답 대신 건설 일을 하신다며 어벌쩡하게 넘어가곤 했다. 그리고 듣는 이는 그 의미를 건설업 대표로 오해했다. 번듯한 자식의 부모는 당연히 번듯한 부모일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대표가 아니라 건설노동자이십니다”라고 올바르게 고쳐내지 못했던 순간은 그녀에게 부모를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게 했다. 그런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가득 차올랐을 때 그녀는 자신 안에 담긴 부모에 대한 감정을 마주하고자 글을 썼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부모라는 두 글자 앞에서 나는 자주 망설였고, 미적거리고 감출 때마다 내뱉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 쌓였다. 자꾸만 쌓이고 쌓여 갑갑했다. 이걸 어떻게 해서든 꺼내지 않으면 내 부모가 부정될 것 같았다.
(…)
나는 글로 내 삶을 정돈하고 싶었다.”
_ 나는 자식이 되어간다 중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말들이 곪아 있었는지, 그녀는 쓸 때마다 몸살을 앓고, 헛구역질을 하고, 잠을 못 자고, 희읍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쓸 때마다 아팠지만 쓸 때마다 건강해졌다고도 덧붙였다. 말을 업으로 삼은 아나운서인 저자는 일부러 쓰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고 선택했다고 말했다. 글에는 즉흥도 애드리브도 통하지 않는다며 최선을 다해 공들여 글로 남겨두려 했다고 말이다. 공들이며 애쓰는 마음으로 자신과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며 '말하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된 그녀는 쓰면서 글이 가진 힘을, 연대를,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아픔은 너무 깊고 매우 무거워서 스스로 마주하기도 버겁고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처럼 팔을 뻗어 어딘가에 내놓은 위로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글을 '쓴' 저자와 이 글을 '읽은' 나, 우리 모두에게 적잖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것이 글의 힘이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맺어진, 쉽사리 끊어질 수 없는 끈끈한 연대감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
끝으로 세상은 점점 더 부와 학벌의 대물림이 당연시되어가지만, 나는 세상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살만해졌으면 싶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말이 전혀 가당치 않다면, 노력 없이 거저 얻은 가로축 세상의 자식들 때문에 한 계단 한 계단 열심히 노력해서 세로축을 올라온 자식들이 성취감 대신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만큼은 아니었으면 한다. 무엇이 되었든 정직한 노력은 보람을 느껴야 마땅하고 성실한 노동은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예외 없이,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