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비휘 May 08. 2021

때론 냉장고인  나도  텅 비우고 싶다.

터져 나올 듯 잔뜩 든 냉장고 정리는언제나 숙제!

하나하나 꺼내 놓다 보니 순식간에 산더미다. 이 많은 것들이 어느 구석구석 들어앉았었나 싶을 만큼 끝없이 나온다. 반듯한 네모 몸 안에 미련하게 넣어주는 대로 받아먹다 더 이상 삼키지 못하고 꾸역꾸역 뱉어낼 즈음. 많이 찼다 더 이상은 안 된다의 신호는 곳곳에 보내줘도 모두가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을 거다.     


주인아줌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반찬 유리그릇을 부딪히게 넣고 콰앙! 따닝은 다이어트용으로 냉동고에 넣어둔 닭가슴살 소시지가 와르르 무너지는데도 카앙콩!. 그 집 바깥 주인장은 시도 때도 없이 주문한 비비고 만두와 삼진 어묵세트, 보리빵이 밀리다 못해 삐져나와 빼꼼 열린 문이 꽉 닫히지 않는 걸 힘으로 꽈쾅. 아드닝은 주시에서 사 온 키위주스랑 수박주스를 넣어두고 꽈쾅.    


어느 누구 자리 정렬, 우르르 쏟아질까 꺼내서 재정리 기대는 어림없고, 먹다 남은 힘으로 쾅쾅 소리 나게 힘주어 닫을 때 흔들리는 틈 타 각자 자리 확보하여 살아가는 수밖에. 꽉 찬 대중버스 입구만 빼곡할 때 운전기사님 급브레이크 살짝 밟아 자동으로 뒷자리 발걸음 옮겨놓게 하듯 냉장고 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시작이 되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니 하루 날 잡아 꺼내 놓아야 함을 알기에 그냥 덮고 넘어갔을 텐데. 주인아줌마 오늘이 그날인가. 아침 먹고 설거지 끝내자마자 내 안의 모든 것을 꺼내놓기 시작이다.


‘아~ 꺼억!’


몇 달 묵은 체증 내려가듯 트림이 나왔다. 억지로라도 몇몇이 끌려 나가고 나니 살 거 같다. 아줌마가 맘을 단단히 먹었나(?)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걸 꺼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종합검진받기 위해 똥물이 나오다 말고 희멀건 물 나올 때까지 쫘악쫘 품어내 몸 청소하듯 내 몸 안도 말갛게 완전히 비어졌다.    


개운함과 시원함, 널널함을 느껴본 지 언제였던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나 싶어 우짜든 동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텅 빔의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유리알 같은 실내등이 오늘따라 밝고 환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라포엠의 퍼펙트] 한 곡을 머릿속으로 다 듣기 전, 벌컥 문이 열렸다. 주인아줌마의 손이 바쁘게 오가더니 옷 단장 새로 입은 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줌마네 시엄니께서 보내주신 쪽파로 담갔던 파김치는 돌아오지 못했다. 먹지도 않으면서 버리기는 아까웠는지 이쪽저쪽 쑤셔 넣더니 이번 참에 큰 맘 잡수셨나. 파 냄새 지독한데 내 속이 다 후련하다.   

  

자리 비좁아 문 닫히지 않았지 않았나. 1mm도 더 늘어나지 않은 내 몸이 어찌 된 게 김치통 두세 개가 들어와도 될 정도의 빈자리가 생겼다. 다음에 먹겠지는 없는 거다. 식구들의 젓가락이 오가지 않으면 즉각 처분하는 게 좋은데, 이 집 아줌마는 좀처럼 버리는 걸 잘 못한다. 그것이 진해 계신 시엄니께서 직접 발걸음 하여 키운 건 더더욱 바닥을 보일 때까지 꾸역꾸역 먹는 거다.    


내가 아줌마의 맘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 몸뚱이를 쫌만 생각해 준다면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서운함이 남는다. 더 이상 퍼져 나앉기 전에 숨통 트이게 해 줘 상쾌한 이 아침.

나의 옆 방 냉동고도 조금 전보다 텅텅 비어 정말 즐겁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거기도 시엄니께서 보내신 늙은 호박 채가 넓은 자리를 차지한단다. 꽁꽁 얼려놨다고 언제 꺼내가서 호박죽을 쑬지... 눈도장 찍혔으니 조만간 불려 나갈 거라 잔뜩 설레 한다는데. 그 집 아줌마랑 따닝만 호박죽을 먹다 보니 손길이 더 뜸해졌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아, 꽁꽁 얼려 있던 아로니아 떠나갔는지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갈아서 요플레랑 섞어 먹을 거라 냉동고 청소 때마다 들어갔다 나왔다 냉동고 안이라도 정말 믿을 건 못 된다는 얘길 듣더니 찜찜함이 이겼나 보다.  

  

며칠 전 부침개 해 먹고 남은 밀가루랑 부침가루는 다시 돌아와 문간 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수삼 선물 받은 걸 안 먹더니 햇볕에 꽝꽝 말려 놓은 것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삼계탕이라도 해 드실 때 잊지 않고 넣으셔야 할 텐데...’

아이들이 치킨을 좋아하고 삼계탕을 잘 먹지 않고 어쩌다 먹는다 해도 뚝배기에 끓여 나오는 걸 한 그릇 사 먹으러 가니 말린 인삼을 쓸 일이 없는 거다.   

 

한눈에 보이게 정리된 이 냉동고와 냉장실이 언제 흐트러지고 문이 닫히지 않을 만큼 밀고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깔끔해진 내 몸속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려야 할 때.    


허걱, 냄비가 밀고 들어온다. 아줌마가 유원지 소라 만났다며 살아 꼬물거리는 소라를 사서 박박 문질러 삶는 걸 봤는데... 혼자 먹어도 그 옛날 맛이라며 윗입술 천장이 까지지 않았으면 계속 먹었을 텐데. 더 이상 못 먹게 되자 나중에 먹기 위해 냄비 째로 들어 앉히는 거다. 아앜~ 냄비 째 2개 더 들어오면 원상복귀 시간문제.    


"냉동고, 넌 아직 괜찮은 거니?"

매거진의 이전글 이번엔 무슨 공사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