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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Jun 21. 2021

잘 커 주어서 정말 고맙다.

선한 영향력이란 그런 건가.

우리 집 식구들에게 중국 동생이라고 말하면 알아듣는 동생이 있다. 3년 전 공인중개사 공부할 때 만난 10살 은 동생이다. 강의실의 항상 앉게 되는 위치에 자리를 잡곤 하는데, 우연히 늘 앞 뒤로 앉게 되었을 터.  그 주변에 앉아 수업을 듣다 보니 얼굴이 낯익고 어느 날의 쉬는 시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말문을 틔었을 테다.


말도 통하고 맘이 맞으니 점심시간 밥도 같이 먹는 사이좋은 관계가 되었다. 서로의 가정사를 알게 되고 얼굴 보이지 않을 때면 궁금해하며 소식을 취하게 되는 사이. 우리말이 조금 어눌한데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먼저 말을 꺼내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느 날 밥을 같이 먹다

“언니, 저 20년 전에 한국으로 온 가족이 오게 된 중국교포예요. 표시 나죠?” 하고 물어왔다.

우리말이 조금 서툴긴 해도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별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공부 시작하기 전엔 남편과 같이 중국 관광객들 가이드 역할하며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곳곳을 다니기도 했단다. 여행지 다니면서 부동산에 눈에 뜨이고 관심 갖게 되면서 노량진에 있는 재개발 투자를 하게 되고 성남에도 투자를 한 뒤 공인중개사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는 거. 10살 적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한국 사람들도 어렵다는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고 있는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게 보이던지.


일상적인 대화도 이해 안 될 때가 많다는데, 법에 나오는 단어의 이해까지 그녀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더 그러했을 거다.


어렵다는 부동산공법 기본서를 죄다 외웠는지 모르는 걸 물어보면 책 페이지 착착 펼쳐 보이는 그녀가 멋져 보였다. 어찌나 핵심 요약정리도 잘해 놓았는지. 유튜브 경제 방송에 나오는 중국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같았다.


그 당시 고1 아들 이야기도 하곤 했다. 말썽을 부린다는 거다. 그녀를 봐서는 학교에서 사고뭉치로 불릴 정도의 아들이 상상되지 않는데,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가끔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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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들이 철이 들고 맘을 고쳐먹었는지 엄마가 다니는 독서실도 같이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엔 정말 다행이고 잘됐다며 같이 기뻐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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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취득 후, 각자 중개사 사무소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소식을  나누었다. 한 번씩 서로의 집 근처에 있는 맛집을 소개해 주며 맘을 모았다. 나이가 10살이나 적은 동생, 나보다 훨씬 경제관념이 투철하고 투자도 잘해 부를 이룬 걸 보면 난 근처도 못 따갈 정도다. 그런데도 만남 후나 통화 후엔 맘에 위로가 되고 따뜻해진다고 하니 만남을 계속 이어오고 있는 거였다.


엊그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처럼 손님과 부대끼는 일과 고 3 아들이 축구하다 다리를 다쳐 수술 후 속상한 이야기거니 했다.


“언니, 부탁이 있어요. 혹시 과외선생님 아시는 분 있으세요?”


고 3 아들이 기초가 탄탄하지 않아 맘을 고쳐먹고 밤낮으로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데, 설상가상 축구하다 다리 골절로 깁스까지 한 상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 학원가기도 힘들고, 앱으로 찾아 공부했던 과외선생님은 늘 맞지 않아 바꾸다가 세월 다 갔다는 거다.


과외선생님이라면 우리 아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지금 몇 년째인데... 여러 해가 지나고 연락 안 한지도 오래고. 그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선생님 연락처가 있으니, 연락 한 번 취해보겠다고.


다행히 과외선생님한테 얼마 안 있어 답장이 왔다. 여러 해 지났으니 서울대 박사과정 후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에 취직이 되시고, 아는 후배라도 소개해 주겠다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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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박 OO과외 선생님 기억 나?"

오랜만에 연락을 취했던 터라 울 아드닝한테 물어보았다.

“아, sns에서 서로 소식은 알고 있어요. 삼성 다니신다고 하시죠?”


중국 동생이 부탁을 해 와 그 선생님을 소개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제가 오래돼서 공부를 가르쳐 줄 입장은 못 되고, 그 학생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정도는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학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면요.”

“어머, 우리 아드닝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중국 동생한테 물어볼게. 중요한 건 그 아들 맘이잖아. 네 말대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


내 아드닝이지만, 정말 고마웠다. 그녀에겐 외동아들이라 맘 나누고 싸울 형이나 동생도 없어 동네 형처럼 고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고 동기부여가 될 거 같았다.


그녀는 당연히 좋아하고 고맙다고 했다. 문제는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는 거다.


다행히 아들도 좋다고 했다며 곧바로 전화번호를 보내왔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 맘을 다지는데 도움을 주면 좋으니까 엄마들은 더 서두르게 되었다. 울 아드닝도 그 맘을 알고 일요일 오후 2시 30분으로 정해졌단다. 다리 다친 아들을 배려해 그 집 근처 카페로 장소는 정해졌나 보다.


성신여대 주변에 살고 있어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40여분. 가는 길에 어머님이 택배로 보내주신 감자와 울 텃밭에서 수확한 상추를 나눠주고 싶었다. 지하철역에 나와 받아갈 수 있냐니까 너무 좋단다. 문제는 울 아드닝이 그걸 들고 지하철을 탈 수 있느냐고. 아드닝한테 물어봐야 하는 일이긴 했다. 만약 싫다고 해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아들 키우는 엄마들이니까.


예상외로 아드닝은 괜찮다고 했다. 그녀 또한 의외의 반응에 우린 전화기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쇼핑백을 어찌 들고 가려나. 거기까진 생각 못하고 먼저 그녀에게 먹거리를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 선말 후 고민이다. 폼생폼사일 텐데... 참, 나도 울 아드닝 스탈 구길 걱정은 하나도 안 했네. 혼자 생각하며 쇼핑백을 건넸다. 잠시 후 괜한 걱정을 했다 싶다.

메고 다니는 큰 가방 속에 쏘옥 집어넣는 거다.


먼저 그 길을 걸은 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고 나서는 아드닝의 뒷모습이 키다리 아저씨만큼이나 마음이 커 보였다.


그녀는 울 아드닝을 만나 잘 전해받았다며, 가방에서 꺼내 건네주며 하는 말이 인상 깊었대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거 우리 어머니께서 전해 주시라고 하셨어요.”


아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냐며 어머니란 말이 콕 와서 박혔다는 거다.


아, 그거 7살 때 태권도를 보냈더니 관장님께서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게 하신 것이 오늘날까지 부른 거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어머니라고 부르다 보니 뒷말은 자연스레 존댓말로 이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무이라고 부르는데.


그녀 아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일 하러 나선 길이 내 아드닝의 장점을 더 알게 되는.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을 한 기분이다.


‘울 아드닝, 많이 멋지고 고맙다. 누군가를 도움 줄 아는 사람으로 정말 잘 커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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