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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Aug 07. 2021

몽몽 아씨

브런치 공모

아름다운 숲이 있는 마을에 기차가 지나다녔어요. 서울에서 춘천까지 갈 수도 있었지요.

세월이 지나 기차는 다른 길로 다니고  이름 없는 풀과 들꽃이 하늘거리는 기찻길만 남았어요.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그 길을 가꾸고 다듬어주기 시작했어요. 봄이면 수선화, 패랭이꽃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해바라기, 봉숭아, 채송화가 꽃을 피워 올렸지요. 가을에는 구절초와 코스모스꽃이 반겨주고 겨울에는 동백꽃이 하얀 얼음 눈꽃을 모자처럼 쓰고 있었어요. 잎이 무성한 키가 큰 나무들도 계절 따라 꽃들이  바뀔 때마다 예쁜 색으로 변화를 주었지요.


 부지런한 사람들은 한쪽 모퉁이에 텃밭을 일구었어요. 온갖 작물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걸 떠올리니 더 좋았답니다.


봄이 되자 토 아저씨는 텃밭 가장자리에 호박씨 네 알을 심었어요. 토톡토톡 떨어지는 비를 맞고 씨앗의 껍질이 벌어지며 흙 속에 포옥 안기자, 몸이 간질간질한 자리에 초록 이파리가 삐죽 나왔어요.


“어머, 이것 좀 봐요. 줄기가 쭈욱 뻗어가는 곳에 벌써 별 닮은 노란 꽃이 폈어요.”

영 아줌마가 말했죠.

작은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며 탐구하기 좋아하는 영 아줌마의 눈에  반짝하는 것이 보였지 뭐예요.

그 속에  공기 방울 닮은 호박씨 크기의 작고 작은 아씨가 들어앉은 게 아니겠어요.


“제 이름은 몽몽이예요. 저는 호박 향이라면 뭐든 좋아하고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 호박향의 꽃도 왕별 모양이잖아요.” 

“자세히 보아야 보이겠구나. 눈에 잘 띄지 않고 보이지도 않아.” 

영 아줌마가 말했지요.

“매일 아침 햇살이 비칠 때면 붕붕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찾아와요. 그럴 땐 잠시 꽃잎 뒤 이파리에 나가 있어요. 붕붕이는 저를 좋아하는지 곁으로 바짝 다가오는데요, 한 번씩 놀랄 때면 침을 뽀죡 내밀어 누구든 쏘는 거예요. 한 달 전엔 오른쪽 눈 옆을 침에 쏘였어요. 눈두덩이 퉁퉁 부어올라 앞을 볼 수 없었답니다.”

“저런 저런 그만하기 다행이야. 큰 일 날 뻔했구나! 앞으로 난 너를 볼 때면 귀엽고 앙증맞아 몽몽 아씨라 부를 테야. 괜찮겠니?”

“좋아요. 다음에 또 만나요.” 


토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텃밭을 열심히 가꾸었어요. 텃밭 작물의 열매가 알차게 자랄 수 있도록 지지대도 세워주고 풀도 뽑아주었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보기만 해도 물조리개의 떨어지는 물을 머금은 싱싱한 이파리와 탐스럽게 열린 토마토와 오이, 가지, 고추, 애플수박을 보는 즐거움에 마음이 풍요로워졌거든요.


“여봉,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어쩜 이리 잘 가꿨을까요?”

“누구 텃밭인지 모르지만, 정성이 엄청 많이 들어갔어. 하루가 다르게 밀어붙이는 풀떼기의 세력 만만찮을 텐데, 늘 갓 이발하고 나온 마냥 깨끗한 거 보면 말야. 지지대 세워준 것 보니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어 보이는 게 예술품이 따로 없어. 지지대 자태가 보통 솜씨가 아니란 말이지. 지금이야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지만, 한 때 우리도 엄청난 농장을 일구지 않았소.”


 


그 말을 듣고 있던 뭉뭉 아씨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공기방울 닮은 건 공기 중에 태어나 언제 어디서든 스며들고 보일 수 있을거란 얘기를 물방울 도령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요.  토 아저씨 밭에  머물게 된 걸 알 거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호박향이 많이 나는 걸 보니 호박을 많이 심었나 봐요.  제게 이 곳이 가장 많이 생각 날 정도로 고향과 같이 친숙한 곳이예요.


“어어, 끈적끈적 미끈하게 다가오는 너는 누구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 집이 있는 달팽이야. 넌 이상하게 생겼는데, 집이 어디니?”

“호박밭이 내 집이었어. 처음부터 여기 있었거든. 보들보들 꽃잎 속에 있는 건 벨벳 카펫 위에 있는 거 같아.” 


달팽이는 몽몽 아씨가 좋았지만, 부끄러워 집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어요. 몽몽 아씨는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자신 없는 달팽이가 못마땅했어요. 그걸 알게 된 달팽이는 기어가지도 못하고 돌돌 말아 들인 몸 때문에 땅으로 툭 떨어져 굴러가 버렸어요.


어디선가 큰 눈 점박이 나비가 날개를 팔락이며 날아왔어요. 

“네 몸에 있는 큰 점박이가 눈처럼 무섭게 보여. 누구니 넌?”

“난 팔랑팔랑 고운 날갯짓이 유명한 점박이 나비야. 마침 색시를 구하러 다니던 중이었는데, 내  색시가 되어주겠니? 우리 집엔 먹을 것도 입을 옷도 많아.”

“갑자기?  난 무서운 걸 못 견뎌. 싫어 싫어.”

작은 몸을  보들보들 떠는 걸 본 큰 눈 점박이 나비는 마음이 약해 계속 강요할 수 없었어요.


목이 말라 큰 나무에 살던 장수풍뎅이가 땅으로 내려왔다가 몽몽 아씨 소식을  큰 눈 점박이 나비에게 전해 들었어요.

어기적어기적 바삐 걸어 몽몽 아씨를 찾은 장수풍뎅이는 맘이 흐뭇했어요.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아이가 이렇게 깜찍하고 예쁠 줄 몰랐거든요.


“반가워, 너를 만난 건 행운이야. 우리 악수라도 해 볼까?”

 불도우저 같은 투구를 머리에 달고선 시커먼 손을 내밀었어요.  손을 뿌리치며 뒷걸음치듯 도망치자 꼼짝 마라 소리치며 밀고 들어왔어요. 힘껏 내달려도 작은 다리로 뛰다 보니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죠

.

“가긴 어딜 도망가겠다는 거야. 난 네가 무척 맘에 들어.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지 않으련. 우리 집은 아주 넓고 높다랗다구. 이 숲 속 기찻길 마을과 텃밭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멋진 곳이지. 하하하.” 

장수풍뎅이는 마을이 떠나갈 듯 크게 웃었어요. 


“살려주세요. 영아줌마, 토아저씨 어디 계신 거예요?”

급하니까 잘 알고 있던 친절하고 따뜻한 영 아줌마와 토 아저씨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텃밭에서 멀리 살고 계신 영 아줌마와 토 아저씨 귀에 들릴 리가 없겠지요. 어쩔 수 없이 뾰족뾰족 침이 나 있는 다리에 감겨 붙잡혀 가고 있었어요.


“이잉히잉...”

가느다란 떨림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거미 아줌마가 들었어요. 마침 모기 한 마리를 점심으로 배불리 먹고 해먹에 올라앉아 낮잠을 즐기려던 참이었거든요. 이쪽저쪽으로 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구해주려 했지만, 장수풍뎅이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답니다. 장수풍뎅이를 거미줄에 올라타게 했다가는 그 무게로 거미줄이 한방에 축 늘어져 땅으로 떨어질 게 분명하니까요.


“잉잉, 내가 어쩌다 이 높고 먼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몽몽아씨는 참깨, 들깨보다 작은 눈물방울을  떨구었어요. 그것이 그 옆을  날아가던 꼬리 빠알간 고추잠자리 날개에 톡 떨어졌어요.


“앗, 차가워. 뭐가 떨어진 거지? 둥근 달빛 훤히 비치는 저녁 무렵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

눈알을 360도  돌려 살펴보던 고추잠자리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장수풍뎅이의 큰 발에 감긴 작은 몽몽 아씨의 두 눈과 마주쳤어요. 


'어, 불쌍한 저 작은 애를 내가 구해주어야겠어.'

그 주위를 맴돌며 이쪽으로 날았다 저쪽으로 날았다 바삐 움직이며 기회를 엿보던 고추잠자리.

때마침 장수풍뎅이의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어요. 밤잠을 일찍 자는 버릇이 발 안에 작고 깜찍한 몽몽 아씨가 있어도 졸음을 참지 못한 거예요.


이때다, 하나 두울 셋 셀 때 내 등에  잽싸게 올라타라는 신호를 몽몽 아씨는 알아차렸어요.


“하나 두울 세엣.” 

장수풍뎅이가 잠에서 깰까 봐 덜덜 떨린 나머지 목소리가 크게 나와버렸어요. 때마침 맴매 매매~ 노래하는 매미 소리에 묻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급히 나는 고추잠자리의 날갯짓이 기울어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쿠당당쿵쾅!!’ 

요란하게 떨어질 줄 알았는데, 폭신한 느낌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겁니다. 때마침 땅 위로 기어 나온 큰 지렁이 등 위였어요.

“히히, 잘 만났어. 아무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땡볕에 물은 없고 목도 마르고 몸이 말라죽을 거 같았거든.” 

“내 작은 몸이라도 물을 축여 와 널 구해줄게. 너 아니었음 높은 곳에서 떨어진 난 어떻게 됐을지 몰라.”

위험을 무릅쓰고 장수 풍뎅이한테서 구해준 고추잠자리가 너무 고마워 도와주고 싶었어요.


응달진 곳 고인 물에서 몸을 푹 축인 몽몽 아씨는 지렁이 등에다 문질러 주었어요. 워낙 몸이 긴 지렁이라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했지요.

지렁이는 겨우 기운을 차려 풀숲으로 스르륵 사라진 뒤  몽몽 아씨는 그만 기진맥진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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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일찍, 텃밭으로 가던 영 아줌마와 토 아저씨 부부의 눈에 딱 띄었어요.

“어어, 우리 텃밭 요정이라 할 수 있는 몽몽 아씨가 아닌가요, 어쩌다 여기까지...”

늘 아끼고 생각하는 사이니까 바로 눈에 보인 거죠.


영 아줌마는 조심스레 들어 올려 손안에 감싸 안았어요. 몽몽 아씨는 영 아줌마의 손 기운이 느껴지자, 살 것만 같았지요. 


호박 줄기가 쭉쭉 뻗어가는 호박밭. 진노랑 호박 향기가 나는 호박꽃 위에 살짝 내려놓아 주셨어요. 호박꽃 향기를 맡으니 기운이 더 나는 듯 했어요.


토 아저씨와 영 아줌마가 밭 일을 하는 동안 호박꽃 안에 누워 참새들의 노래를 들었어요.  잠시 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호박잎에 맺힌 동그란 이슬을 받아 마셨지요.  일하는 틈틈이 몽몽 아씨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걸 본 영 아줌마, 토 아저씨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가득 번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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