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에선 똥 손인 내가 아날로그에선 금손인가. 텃밭에 나가 심을 거리 꾹꾹 흙속에 꽂아 두거나 씨를 살살 뿌려 흙을 덮어준 일주일 후 가보면 비좁게 자라 있는 거다.
"나 알타리 무, 여기 있어요!'
'저는 순무예요.'
'저는 열무입니다.'
서로 밀치기라도 하듯 빼곡히 올라와 있는 모양을 봐선 잘 알지 못한다. 벌개미취, 구절초, 쑥부쟁이가 구별 안 되듯 순무, 알타리 무, 총각무, 열무 등 떡잎이 올라오는 어린싹일 땐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싹을 밀어 올리고 난 뒤 잎이 언뜻언뜻 자줏빛을 보이는 건 순무라는 걸 뿌리를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그게 그거 같은 걸 애써 구별해 보려 해야 알 수 있는.
비좁든 말든 많이 크지 않더라도 씨 뿌려 싹 틔운 건 그대로 두고 싶었다. 이쪽저쪽 다니며 그이는 과감하게 솎아준다는 이름을 빌어 잘도 쭈욱 뽑아냈다. 뽑혀 올라온 잎을 봐도 별 구별되지 않는다. 순무는 뿌리가 나면서부터 자주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쪽파 모종 심은 건 겉잎이 누레지며 모종 때보다 조금 도톰해졌을 뿐 더 이상 속 싹을 내보이진 않았다. 먹을 만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남은 씨를 뿌려주면 일주일 후 다시 싹이 올라오는 것이 신기해서 뿌렸다. 그이는 늦게 심은 건 잘 크지 않는다며 한사코 말렸지만, 씨 뿌리는 것이나 싹 올라오는 것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좋아 그냥 뿌려두었다.
얼마나 크다 말지 모르지만, 말간 초록의 잎을 내밀긴 했다. 초등시절 화분에 강낭콩 심기 할 때 씨앗의 2~3배 깊이로 심어야 좋다고 했다. 무씨들은 강낭콩보다 훨씬 작아 더 깊이 묻으면 안 될 텐데...
심고 나서 생각이 났다.
호미로 흙 고랑을 파서 씨를 살살 흩어주고 옆에 고랑 팔 때 모아놓은 흙을 덮어주는 거다. 두 세배가 아니라 열 배 깊이였을 텐데, 거뜬히 뚫고 올라온 거다.
하긴 아무 데나 떨어진 씨앗도 싹 틔우는데 1등인 녀석들. 쟁기와 호미로 밭을 고른 뒤 애정 담긴 흙 품에 안겨주었으니. 놀이터 만난 아이들이었던 셈이다.
“우와~ 어떻게 내가 심은 것들은 비실되는 녀석이 하나도 없어. 뽀송뽀송 생기 가득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기까지. 역시 내손은 금손이야!!”
그이는 어이없다는 듯 옆에서 웃기만 한다. 여름작물 뽑아내고 밭 뒤집어 고른 밭 만들어 줬더니 씨앗 몇 개, 모종 몇 개 심어놓고 생색낸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눈길 돌려봐도 비실비실 거리는 다른 텃밭 녀석들이 보이는 거다.
물이나 거름을 너무 많이 준 건지. 안 맞는 게 있는 것일 텐데, 눈으로 봐선 잘 모르겠다.
신기한 건 우리 텃밭 바로 옆. 젊은 신혼부부가 열과 성을 다해 처음엔 몇 번 찾았다.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봄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있다.
여름날 풀들로 뒤덮여 여기가 풀밭인지 텃밭인지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던 때. 신기하게 군데군데 심어놓은 고구마 줄기들, 고춧대와 가지대는 꿋꿋이 살아있었다. 풀들이 얼씬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구마, 고구마 줄기의 빽빽함이 어디 한 곳 풀씨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나 보다.
사람의 손품 없이 풀 한 포기 자리 내주지 않는 것은 단연 고구마가 1등이다. 고구마, 자기들만의 똘똘 뭉치는응집력. 고구마를 한 번도 심지 않아 몰라뵀다. 그 아무도 따라올 자 없는 강한 식물임을 처음으로 보았던 거다. 내년에는 풀 뽑을 일 없을 고구마, 빈틈 하나 내주지 않는 밤고구마, 호박고구마를 심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내 손은 금손이라 고구마가 끝없이 줄줄 딸려 올라올 것을 상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가. 그렇다 해도 상상의 창공은 나의 것이니까.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면 더 좋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