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더 높고 더 깊고 더 삐까번쩍인 곳으로 눈 돌렸던 적 있습니다. 그곳에 몸 담아야 제대로 사는 삶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여우의 신포도처럼 도저히 시어서 먹을 수가 없다며 신포도보다 더 달고 맛있는 포도 맛을 새롭게 안 것처럼. 낯선 동네에 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아웅다웅 살아가는 모습에 정겨움마저 느꼈었어요.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에도 보일러 틀지 않아도 될 만큼 햇살 잘 드는 정남향 아파트.
지은 지 오래되고 손 한 번 보지 않은 아파트 발코니 샷시가 덜컹대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찬바람 들어오지 않고 낮 동안 햇살로 데워진 훈기로 지내도 될 만큼 따순 집이니까요.
밖으로만 향해 있던 맘이 안으로 향하던 때 숲길에 걸린 마을 산책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늦가을 집 근처였던 곳에서 이번엔 조금 떨어진 곳이랍니다.
모이기로 약속된 날은 바람 불어 찬 공기가 쏴하다 못해 칼칼했습니다. 살갗이 드러나면 찬바람에 베이고 얼어 터질 듯 혹독한 추위였어요.
매일 호흡하며 살고 있는 집 근처를 마음으로 다가가는 인문학 마을 산책이란 이름에 이끌렸던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바람이나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했던 이 동네가 살다 보니 전혀 겉돌지 않고 몸에 착 감기는 이불처럼 느껴지는 이 편안함이라니.
태생이 촌사람이라 이 동네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얽힌 유래를 알고 지나다니면 좀 더 가깝고 친근함이 더할 거 같았습니다.
마을 산책하며 해설가의 설명과 곁들여 시인 분의 마을 사랑법 이야기도, 뮤지컬 배우의 노래와, 시 낭송가 낭송이 어우러져 함께 거닐며 마을이 무대가 되는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겨를 없이 그냥저냥 오가던 곳을 해설과 함께 산책하며 뮤지컬 배우의 공연을 눈앞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행운이라니. 찾아가는 마을 공연단 같았습니다.
아, 이럴 때 노래나 시낭송, 악기 하나 연주할 수 있으면 존재 자체로 감성 풍부한 예술가가 되어보는 건데...
끈기와 꾸준함 없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배우려고 기웃거렸던 나날만 합쳐도 뭔가는 선보일 수 시간인데도 남들 앞에 나서 제대로 선보일 수 있는 재주 하나 없으니.
서울이라는 도시에선 우리 동네, 우리 고장, 우리 지역이라 불러줘야 어울릴 거 같은데, 마을이라는 정답고 고운 이름을 매단 산책이 정겹고 정답게 여겨졌습니다.
마을 산책을 하다 보니 어릴 적 놀던 골목길이 나오고, 도랑과 낮은 언덕 위의 과수원 밭이 펼쳐지는.
아파트를 지을 때 보호수를 온전히 살리고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곳도 알게 되고. 곳곳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사랑방, 공부방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의 봉사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뜻밖에 아파트가 둘러싸인 곳에서 기역자 모양 기와집을 방문했습니다. 마당이 있고 돌담으로 단장된 150년 된 집. 자부심으로 집의 유래까지 설명하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드님이 살고 계신 집. 내부는 현대식 개조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낯선 이들의 방문을 따뜻한 차로 반겨주셨습니다.
대들보와 주춧돌, 나무 기둥으로 지어진 집은 향토문화재 보호로 주민들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합니다.
낡고 허름한 집이라 부숴 없애려 하지 않고 지키고 보존하려는 마음. 어릴 적도 떠올리고 한 번도 본 적 없이 자랐을 아이들에게 어른들 삶의 지혜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보다 살아있는 교육이 어디 있을까요.
온몸을 꽁꽁 싸맨 이웃들과 눈만 내놓고 다 함께 마을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냥 스윽 지나쳤던 그 길 위에서 해설가 분의 이야기 듣고 보니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르리라.]
유홍준 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온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언 몸을 잠시 녹이려 카페를 들렀을 때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한 곳에서 20~30년 사신 분이 몇 분 계시고, 이사가 잦아 동네를 알기도 전에 옮겨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후자에 속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을에 대한 애정의 밀도가 엄청 높다는 것을. 이 뜨내기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사람들 몰리는 시간을 피해 새벽시간 몇 년째 마을 청소하시는 분. 아파트 안 은행나무 보호수 밑 낙엽이나 은행 알을 밟지 않게 쓸어주시는 분.
마을 정원에 계절별 꽃을 심고 이름표를 꽂아주는 일 등 끝이 없었습니다.
산책길 공원 의자 위 아무렇게 버린 과자봉지나 플라스틱 컵 있는 걸 보면서 선뜻 주워 버리지 않고 지나치곤 했는데요, 주워 담을 비닐봉지를 하나 준비하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어요.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나 후미진 곳을 방치하지 않고 가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 주변부터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이 사람들 뭐지. 집 청소만도 헉헉거리는데, 아무도 모르는 새벽시간 마을 청소까지 하고 계시다니. 살고 있는 집 주변인 마을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가슴 뭉클한 얘기에 분위기는 금방 훈훈해졌습니다.
행사를 주관하신 대표님께선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는 어릴 적 평화로웠던 풍경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계속해나가고 계신답니다. 저런 분이 주위에 계신 것만으로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십 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 경험치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단 한 사람부터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돈 버는 일이 아님에도 주변을 위하여 진심이신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이야기 말미에는 살아온 경험치를 녹여내어 앞으로 마을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제가 머무는 그곳에서부터 도움 될 일을 찾아보자며 눈을 돌려보렵니다.
집 밖을 나서면 눈에 띄지 않았던. 눈여겨보지 않았고 낡고 오래되어 하등의 보잘 거 없다고 여겼던 그런 곳이 숨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허물어지지 않고 지켜지고 있단 새로운 사실에 가슴 뜨거웠던 날.
열정 가득, 가슴 따뜻한 사람들로 똘똘 뭉친 이들. 찬바람 불고 영하의 찬기온도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가로막지 못했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