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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Jan 01. 2021

'진짜 내가 뭐라고.'

주어진 하루 정성껏 살기

새벽부터 여러 카톡방의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이 방 저 방에서 모두 어려운 여건에서 잘 살아냈고, 잘 살고 있고, 잘 살아가자며 스스로와 모두에게 응원과 덕담이 종일 오갔다.    


년 중 마지막 날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 누가 집을 보러 올까(?) 느슨히 생각했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선 청년이 1월부터 서울로 발령받았다며 투룸을 당장 구해 입주까지 마쳐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그 와중에 내 눈에 띈 단톡 방의 한 톡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두가 활발히 주거니 받거니 가운데 소모임 리더인 브메랑님이 내게 툭 던진 말이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정에 반해 꼭 출간할 수 있게 도와드리고 싶다는 거다.    


글을 열심히 쓰다 보면 출판사에서 연락 올 수 있단 말을 들은 게 있어 막연한 기대만 하고 있었다. 글이 모자라기에 무조건 불쑥 삐져나오는 걸 붙들어 쓰다 보면 글 양이 많아질 거 같았다. 하루하루 써나가다 보니 9월 말 브런치 작가가 된 후 어쭙잖은 글 70편을 넘기고 있는 거다. 근데 이게 왠지 빈말이 아니고 곧 다가올 기쁜 일이 될 거 같아 하루 종일 맘이 부풀어 올랐다.    


결혼 전부터 하던 일의  업종을 조금씩 바꿔가며 지금까지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브메랑님의 작가 되게 도움 주고 싶다는 톡을 보다 보니 지금까지 일할 수 있는 것도 온전한 나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던 독서실의 나를 복지회관 열람실 직원으로 앉게 하신 분이 계셨고, 눈높이 교육 교사로 일하다 아이 둘을 낳고 도저히 다닐 수 없겠다 그만두었을 땐, 집으로 찾아온 남자 팀장님의 정성이 갸륵했다.

젊고  예쁜 아가씨 선생님도  많을 덴데, 아이 둘 딸린  이 아줌마가  진짜 뭐라고. 감사해서  다시 일하러 나갔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금은 방과 후 교사(특기적성 교사)로 일할 땐 수업이 일찍 끝나는 저학년 교실을 빌려 사용했다. 내가 수업하는 동안 그 교실 담임교사는 연구실엘 가거나 비워줘야 했기에 개인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항상 미안한 맘이었다. 그런데 빌려 사용했던 그 담임교사들의 자녀를 수업에 참여케 하시고, 친한 동료 교사의 자녀까지   등록하여  보내주셨다. 신세라고 여겼던 맘이 인정해주고 믿는 거 같아 기쁜 맘으로 다녔던 기억이다.


어느 해엔 그 교실 사용했던 담임 선생님이 우리 아이 다니는 학교로 전근 오셨다. 심지어 딸아이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가 무슨 일로 바삐 다니는지 부수적인 설명이 필요치 않는 것만도 내겐 한시름 들었었다.

물론, 담임이 되신  남선생님의 따님도 나의 제자였었고.    


서울로 이사 온 후엔 유아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오래전 유치부가 힘들다는 경험을 했었기에 깨끗이 접은 줄 알았다. 막연히 꿈꾸던 유치부 교사 일이 내게 현실로 다가오니 꿈만 같았다. 두 아이를 기르고 하는 일이라 정말 예뻤고 신기했다. 한 해 두 해가 거듭되니 생각보다 더 힘들고 몸이 지쳐 집에 오면 쓰러져 자는 일이 허다했다. 고민 고민하다 그만둔다는 말을 꺼냈다. 원장님은 최대한 내가 원하는 편리를 다 봐주셨다. 아이 둘을 챙겨가며 할 수 있도록 많은 부분 배려를 해 주시는 거였다. 정규수업만 끝내고 퇴근하게 해 주셨으니. 어느 해엔 과일을 사서 집 앞까지 들고  돈까지 주고 가셨다.

‘진짜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다시 힘을 내보자고 다닌 게 10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는 따닝이 한 번씩 그런 이야기를 한다.

“엄마, 나도 엄마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 내가 어떤 이유로 그만둔다는 말을 꺼냈을 때 원장님이든 관리자든 절대 그만둘 수 없다며 붙잡는 그런 존재. 적어도 앓던 이 빠져서 시원하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안 되고 싶어,”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하며 내게 말할 때 놀랐었다. 자존심 강한 원장님이 집 앞까지 찾아왔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며.  컴퓨터나  스마트폰

그런 것도  못하냐구박했던 울 엄마가 그런 존재인가 싶었단다.  그래서인가 따닝은 대학교 때 다니던 알바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정규직을 하며 일요일 격주로 나간다지만 힘들 텐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별 편리를 다 봐준단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바쁘거나 시간 안  될 땐  한 번도  안 와도 된다며 끈을 붙잡고 있단다.


지금 공인중개사 일도 그랬다. 공부해 놨다가 쪼꼬미들 정말 돌보기 힘든 순간 오면 해야지 했던 거였다. 나이 많아 직원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몇 천 많게는 몇 억을 투자해 사무실을 차려야 한다. 경험이 없다 보니 괜한 걱정만 늘 거 같았다. 같이 공부했던 동생이 언니 일해 보라며 소개해줬던 곳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거다.  

브메랑님의 톡을 보다 보니 늘 그래 왔단 생각이 든 거다.

“해봐라, 잘할 수 있을 거다.”


숨어 있는 작은 재능을 봐준 그들로 인해 나는 반짝이며 빛났고, 갈고닦아 더 반짝이려고 노력했던 거였다.

   

나를 깊이 들여다봤을 때 보였던 모습은 도전과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기보다 주어진 일 성실하고 성의를 다하여 하루하루를 산거 같다.    

‘주어진 하루 정성껏 살기’

그 하루하루가 모여 열흘, 1년, 3년, 5년...... 현재의 지금까지.

뭔가를 배우고 익힐 때 이거 해서 꼭 이걸 이뤄내겠다! 이런 것보다 일 하면서 '이거 해 놓으면 좋지 않을까(?) 나이 들어 필요할 거 같으니 이거 해 놔야겠다.' 그런 생각이다 보니 월등히 뛰어나거나 잘하지 않았다.

감사하고 고맙게 공부나 그 일이 끝나기 무섭게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진 건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고.    


누군가의 작은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줬던 그들이 있었던 것처럼 새해엔 나도 그들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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