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오던 날

마음의 관계학

by 헬로해피 최유영

그녀가 오던 날


‘하루는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누구나 다 그런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잊고 싶을 만큼 힘에 겨운 날. 나를 무장해제 시켜놓고 다 털어놓고 싶은 날이지만 털어놓을 만한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했을 때의 외로운 상태. 어느 순간부터 내가 혼자인건 외로움이 아니라 고상하리 만치 고고한 고독인거라고 외로움 따위를 아주 우습게 알던 나도 이때 만큼은 찌질한 고독러가 된 것 같아 슬퍼지는 시간 말이다.

나는 그때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나의 찌질함도, 비인간적인 면도, 결핍도, 다 좋아해주고 허 허 허! 웃어줄 것 만 같은 사람. 그날의 찌질한 나와 주고받았던 말들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완벽히 잊어 줄 사람.


그녀는 내 전화를 기꺼이 반기며 반가이 약속을 만들었다. 이틀 뒤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일이 끝나는 내 일정에 맞춰 우리 동네로 왔다. 나는 그녀가 나타날 지하철 5번 출구 밖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지하벙커로 처벅처벅 빨려들어 갔다 나왔다 교차하고 있었다. 나는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오가는 사람 중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서 놓치기라도 할까봐서 벙커로 향한 긴 계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언제쯤 모습을 드러낼까 긴장마저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지하세계에서 탈출이라도 하듯 지상으로 솟구친 계단을 차곡차곡 기어코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녀에 대해 말해야겠다. 그녀도 내가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말하려 한다. 이대로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잊기엔 그녀는 너무 쓸쓸했고 그녀는 너무 아렸고 그녀는 매력적이다.


그녀의 첫인상은 ‘고단함, 단단함, 버티고 있는,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까 걱정되는, 그렇지만 오뚜기처럼 금방 다시 튀어오를 것 같은 탄성 있는, 낡은 새로움이 베인, 자신의 삶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아 슬픈, 가식을 버린 솔직함’ 등으로 표현될 것 같다.


내 주변에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다. 훌륭하다 못해 나는 기가 눌린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정말 훌륭하기만 해서 항상 행복해 보이거나 늘 밝게 웃고 사는 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늘 그들의 훌륭한 모습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들 옆에 있는 내가 늘 부족해서 초라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연의 시간이 얼마 없던 내 앞에서 울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의 초라함을, 결핍을, 부족함을 숨기지도 않고 철철 흘려버렸다. 사람의 관계에서 이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의 삶에 가장 파급력을 행사한 친정아버지가 여러 여자를 좋아해서 그녀는 자신의 생모와는 몇 년을 채 살지 못했다고. 성인이 된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특이했다. 시어머니의 정갈한 밥상을 보고 결혼을 마음먹었다고. 아버지와 살다보니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고. 그러나 그녀는 결혼 후에도 시어머니의 정갈하고 정성가득한 밥상은 계속 받을 수 있었지만 남편과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러고는 그녀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듯 두 어깨를 철퍼덕 내려놓고 울어버렸다.


사람이 만남을 가졌으니 서로 무슨 이야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친구라고 정의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허물을, 두려운 말들을 그녀처럼 흘러가듯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가 지하벙커로 쑥 쳐박혀 있는 계단을 올라온다. 자기 삶을 건지 듯 꾸역꾸역 삶을 밀고 올라온다. 나는 이날 우리가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주도 먹지 않고 맥주만 삼키던 무장해제 된 그녀의 얼굴이 생각날 뿐이다. 더 이상 울지 않는 얼굴, 편안해진 얼굴만이 기억난다. 하지만 우리의 수많은 이야기 중 질문 하나가 선명히 떠오른다.


“왜 저를 보자고한거에요?”

“가식이 없어서요. 진짜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랬다. 나는 유독 혼란한 날 진짜 대화를 할 사람이 그리웠다. 고운 채에 걸러진 이야기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뒤탈이 남지 않을 그런 믿음직스러운 사람. 자신을 잘나고 그럴듯하고 예쁘게만 포장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람. 그녀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그런 형태의 자신을 별스럽지 않은 듯 내게 보여줬으니 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생각을, 감정을,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렇게 흘려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5번출구 벙커에서 빠져 나오던 날, 우리는 진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를 스스로 가둔 벙커에서 탈출하듯 나로부터 그녀로부터 홀가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는 기억나지 않는 가보다. 진짜들은 다시 기억할 필요가 없다. 가짜의 언어처럼 허탈한 뒤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 오니 카톡이 와 있었다.


“우리 좋은 날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