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비에 흠뻑 젖을 행운

by 헬로해피 최유영

대학교 때 일이다. 갓 스물이 된 무모한 여성들이 겨울등산을 했다. 지리산은 아주 긴 코스라서 우리는 자기 페이스대로 흩어져서 산에 올랐고 장터목 산장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 코펠을 들고 간 녀석이 제일 늦었다. 우리 중 가장 체격이 커서 나름 큰 짐인 코펠을 그 친구 배낭에 매달아 준 것이다. 저녁 7시, 벌써 장터목에는 어둠이 짙어졌다. 나는 친구보다 코펠이 더 기다려졌다. 그날 밤, 우리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검은 밥을 지어먹어야 했다. 다음날 새벽, 정상에 무사히 올라 일출을 보고 하산했던 임팩트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지리산 등반으로 자신감이 생겼나, 여름 방학엔 월출산 등산을 했다. 지리산 보다 낮은 산이라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올라온 복학생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만났다.(내 생각에 복학생 대부분이 그래 보였다) 우리가 가려던 코스는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없다고 했다. 아저씨를 따라 하산해야 했다. 마을은 이미 어둠에 갇혀 있었다. 아저씨가 하룻밤 신세 질 민박집까지 구해 주셨다. 우리는 서둘러 늦은 저녁밥을 해 먹었다. 아저씨도 옆방에서 혼자 밥을 해 먹었다. 아저씨는 우리 때문에 하룻밤을 더 묵아야 했고 여성 등산객 5인방은 방문 고리를 수저로 꼭 걸어 잠그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우산도 없이 버스 정류장까지 콘크리트로 닦인 산비탈길을 꽤 걸어야 했다. 각자 수건을 머리에 쓰고 촌티 나는 학과 체육복을 입었다. 비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비장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는 제법 내렸지만 옷을 흠뻑 적실정도는 아니었다. 신이 나는 경험이었다. 비를 피하지 않고 즐겼던 그 해방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그래서 월출산 여행을 생각하면 여성 5인방이 산비탈길을 비를 맞고 걸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아……! 그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도 잊지 않는다. 아저씨는 말수도 적었고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아저씨에게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제안하지 않았나. 그 시대 젊은 여성들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슬픔을 대변한 사건은 아니었을지. 어찌 되었든 그 뒤로 나는 비에 흠뻑 젖는 원너비를 품게 되었다나 어쩠다나…….


비에 대한 좋은 경험은 또 있다. 한 동안 퇴근 후 M언니랑 호수공원을 자주 걸었다. 그날은 산책을 나가기 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걸으면 얼마나 좋은데. 우리 호수공원 갈래?” M 언니에게 연통이 왔다. 마다할 리가 없었다. 내가 원했던 비 오는 날의 감성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우산을 쓰고 호수공원을 동그랗게 걸었다. 우산과 호수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았다. ‘푸드덕 토도독’ 우산에 떨어지는 비는 내 귓전에 대고 굵은 목소리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세레나데를 불렀고 ‘또도독 또도독’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는 비는 “행복해 행복해”라며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왈츠를 추었다. 우산을 썼지만 장화 안에 물이 가득 차 올라서 철벅 대는 소리가 재밌었다. 감성은 깊었지만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려 애쓰며 걸었기에 해방감을 만끽할 순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다. 오래도록 멈췄던 걷기를 다시 시작했다. 허벅지가 굵으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유머 짤을 보았던 것이다. 내 허벅지는 점점 굵어져서 구스다운처럼 꽉꽉 구겨야 들어가는 바지 10벌쯤을 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이제는 넉넉한 사이즈로 구입한 바지 안에도 살이 꽉 채워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원히 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영원히 사는 뱀파이어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후 다른 세상에 가서 다른 존재로 살아보고 싶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근하자마자 양치와 세수를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작은 합성피혁 가방에 핸드폰만 챙겨서 나갔다. 장마철이라 날이 꾸물거렸다. 우리 집에서 공원까지 30분, 공원 한 바퀴 도는데 60분, 집에 돌아오는 길 30분, 대략 2시간이면 되는 거리인데 조금 늦게 걸으면 2시간 30 정도 걸린다. 공원을 3분의 2를 걸을 무렵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라디오를 들으며 걷는데 22시가 되면 비가 쏟아질 것이라는 예보도 있었다. 내 이마 위로 반짝하고 섬광이 스쳤다. 번개가 아니다. 내 똘기가 발동되는 시그널 같은 것이다.


우산도 없이 공원을 걷고 있는 내가 비를 만난다면 낭패인가? 행운인가? 당연, 내게는 행운인 것이다. 나는 우산 없이 걷다가 소낙비를 맞을 우연한 해방감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이미 비가 오고 있는데! 우산을 쓰지 않고 외출을 하는 것은 참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걷다가 소낙비를 만나는 상상을 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 모양새가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완벽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난다면 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오히려 우산을 못 챙긴 딱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듯한 계략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미친 짓을 원너비(wannabe)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비를 흠뻑 맞을 수 있다면…….


그런 행운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드디어 길을 걷다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걷다가 비에 흠뻑 젖을 행운’을 만나게 된 것이다.


21시 30분, 라디오 DJ의 소낙비 예보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느긋하게 걷는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30분 거리, 이 정도의 시간을 비를 맞을 수 있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공원을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일기예보는 100% 적중을 자랑했다. 22시가 되자 갑자기 하늘에서 굵은 비가 쏟아졌다. 나를 비롯,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폭우가 두두두두 1984 게임의 미사일처럼 하늘에서 내리 꽂혔다. 순식간에 내 몸은 흠뻑 젖었다. 물에 빠진 생쥐 신세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갑자기 귀에 꽂혀 있던 라디오 신호가 끊겼다. 아! 내 핸드폰! 나는 황급히 가방 안에 있는 핸드폰의 생사를 확인했고 가방에 물이 세어 들어가지 않도록 가방 입구를 꽉 움켜쥔 채 가슴에 품고 걸었다. 가방은 기념비적인 오늘의 해방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무사해야 한다.


오늘 같은 날 핸드폰만 없다면……. 아…… 이런! 힘을 빼고 비를 온몸으로 반길 수만은 없었다. 나는 온전히 자유인처럼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핸드폰을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경직된 자세를 취해야 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일은 이렇게 힘이 들고 움켜쥐어야 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경직된 삶을 살아왔던가.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하늘이 중력을 다해 물폭탄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모두 사라졌다. 사뭇 바퀴벌레가 상상되었다. 눈앞에 지하철 역사가 보인다. 나는 굳은 결의로 지하철 역사를 그냥 지나쳤다. 이제 거리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도로 위의 자동차들이 물을 거세게 튀기며 지나갔다. 인도가 개울이 되었다. 첨벙첨벙 물을 밟고 걷는다. 물 위를 걷는다. 나는 이 작은 일탈에서 거센 자유를 느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걸어야 한다는 세상의 인식을 살짝 벗어난 것뿐인데, 이 아무것도 아닌 행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한쪽으로 흐르는 세상의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삐딱한 사람이 해방감을 얻는 방법이란 참으로 작고 간소했다.


세찬 폭우가 내 온몸을 두들겼다. 머리를 타고 내려와 얼굴 위로 흘렀다. 이럴 때 슬픔이 밀려와 울어버린다면 정말 딱이겠다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폭우 속으로 걷는 이 미친 짓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다만 비가 너무 거세어서 내가 상상했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라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일까? 물에 홀딱 젖은 딱 검정 생쥐가 길을 잃어 방황하는 그림? 거센 빗물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건 자학인가? 해방인가? 잠시 헷갈렸다. 아주 험난한 항해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비를 두들겨 맞으며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서 교차로 앞에서 빨간 신호등이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길 기다렸다. 신호가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교차로 사방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볼까 궁금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절대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운동을 나왔다가 우연히 소낙비를 맞은 딱한 사람이 아닌가? 다만 ‘걷다가 비에 흠뻑 젖을 행운’을 거머쥔 것뿐이었다.


험난한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비가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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