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그냥 옆에 있는 사람하고 하는 것이라 했던가? 나도 내 옆에 있던 남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우리 시대엔 지금과는 달리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적었다. 오히려 현실의 도피처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육아를 핑계 삼아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의지하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이 당연한 코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런 소리를 하면 물매 맞기 십상이지만 나는 은근 집에 눌러앉는 것을 원했다.
그때의 철없던 내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곧 희망이었다. 미래에는 차곡차곡 저축이 쌓이고 안정된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불확실성이 불안이 되어버린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분명 그 시절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방한칸으로 시작하는 신혼살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에 모두가 공감을 할 정도로 가난한 시작을 미덕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런 청춘의 가난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긍정의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그런 자신감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전세금 1,300만 원짜리 미아리 반지하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시멘트 냄새와 지하의 쿰쿰한 냄새가 혼합된 방이었다. 두 짝짜리 장농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방 한 칸과 현관에 딱 붙은 한 평남짓의 부엌과 작은 화장실이 전부인 그야말로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그나마 신축건물에 도배장판이 깔끔하게 깔려 있어 좋았다. 나의 작은 방에 비하면 내 독립적인 공간이 두세배는 커졌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반지하 창문을 핑크색 커튼으로 가리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커튼만큼이나 핑크빛이 도는 신혼 생활을 알콩달콩 시작했다…….
첫째를 임신하고 5개월 즈음에 미아리 일대에 큰 비가 들이닥쳤다.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우리의 신혼방은 물에 잠겼고 화장실 배수가 역류했다. 다행히 위험한 신호를 미리 감지한 우리는 장농에 넣어둔 저금통장과 도장이 든 파우치를 꺼내서 창문으로 도망쳐 나왔다. 중요한 것이라곤 정말 그게 전부였다. 정말 다행히도 반 지하라서 밖으로 창문이 나있었고 창문이 외부 지면과 아주 가깝게 맞닿아있어서 탈출하기가 쉬웠다.
순식간에 우리의 작은 보금자리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 일로 내 목걸이 펜던트와 남편의 결혼반지를 잃어버렸다. 결혼사진을 비롯 모든 신혼살림이 물에 잠겼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라면 다행일가. 가난한 살림살이가 위안이 되었다. 초라한 결혼사진은 영영 사라졌지만 그마저도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이었기에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하수구가 넘친 그 방안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집이 전세금을 빼주지 않았다.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나면 보증금을 빼서 주겠다는 것이다. 홍수가 난 반지하 방을 당장 누가 들어올까. 누구도 우리에게 금전적으로 도움 줄 사람은 없었다. 돌아가 쉴 친정집도 없었다. 그나마 정부의 도움(수재민 돕기)이 조금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물에도 끄떡없는 티브,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만 남겨두고 물에 취약한 장농이나 가구들은 모두 버렸다. 그나마 깨끗한 옷과 이불은 세탁을 하여 이불보에 싸서 방 한편에 두고 살아야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살고 싶지 않은 공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처음 겪었다.
이건 뭐지?
삶에 대한 불안이 스멀스멀 화장실의 오물이 역류하는 것처럼 올라왔다.
그 집에서 큰 아이를 낳고 아이가 백일 무렵까지 살았다. 태열기도 없이 깨끗한 피부를 가졌던 내 아기가 오물이 넘쳤던 그래서 온 방 안에 곰팡이가 핀 방에서 100일을 보내는 동안 피부에 열꽃이 폈다. 나는 내 아기의 피부에 핀 열꽃을 보고 내 집 없는 설움과 불안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사를 하고 싶어도 전세 보증금을 빼주지 않는 집주인의 야만적인 행태도 한몫했다. 신혼집에 대한 불행한 경험은 사춘기 때 알게 된 내 공간에 대한 욕망을 더 구체화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기필코 5년 안에 더 이상 불안을 겪지 않아도 될 내 집을 마련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무심코 뱉었던 나와의 약속을 정말로 지켰다. 우리는 5년 만에 경기도 광주에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었고 두 번의 이사를 걸쳐 지금의 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은행의 집이다. 지금도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고 있다. 하지만 이자를 꼬박꼬박 낼 수 있는 형편이라면 불안은 현격히 줄어든다. 깡통주택의 위험이나 한없이 치솟는 전세금 때문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는 은행이 사람보다 신뢰가 높다. 역시 자본! 돈이 최고인가? 그건 모르겠고 편리와 안전함을 갖춘 시스템이 최고인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내 집마련이 일생의 과업이 되어버린 현실. 지난 정권에 주택가격 폭등을 겪더니 이제 하락세로 고통을 겪는 세상이다. 그만큼 불안한 현실이고 미래다. 우리는 이 불안감을 언제쯤 떨쳐버리고 살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