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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Feb 28. 2024

날개 달린 길 '7번 국도'

- 동해와 백두대간의 조합 

# 계절 설레발

소소한 덕장에서 그을린 거친 손이 분주하다.  ⓒ 스침

- 봄도 아직인데, 자꾸 여름을 기다린다. 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우울감을 언젠가 찍어둔 사진으로 달래 본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일 뿐이지만 길 그 자체가 목적지가 될 때도 있다. 7번 국도가 그렇다. 비록 반토막이 났지만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함경북도 온성군을 잇는 이 길은 한반도의 동쪽 경계선을 한 줄로 잇는 해안도로이자 어엿한 여행지다. 한쪽으로는 짙푸른 동해의 파도가 일렁이고 다른 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명산들이 줄지어선 7번 국도. 그러니까 7번 국도는 산과 바다라는 좌우의 날개로 낸 길이다. 


-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원조로 하는 팔경문화는 우리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 등을 만들었다. 8이란 숫자가 땅(地)을 상징한다고 봤던 중국인들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팔경문화를 따르자면 '7번 국도 팔경'도 만들만하다. 


- 언제였는지 기억엔 없지만 처음, 7번 국도를 찾았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솟아올라 도로를 삼키는 장면의 장쾌함과 선명한 색감이 주는 역동성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이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여러 차례 7번 국도를 탔지만 아직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고, 끝내 그 속살을 다 보지 못하리라. 


ⓒ 스침

- 좌우의 날개를 단 7번 국도는 시쳇말로 1+1의 길이기도 하다. 왼쪽 어깨에 바다를 두었을 때와 오른쪽 어깨에 바다를 두었을 때 7번 국도는 다른 길이 된다. 

  

- 사람들은 창포말 등대가 있는 영덕 해맞이 공원 따위의 관광지를 목적지로 삼지만 그건 7번 국도의 진면목을 몰라서다. 이 길의 매력은 최대한 낮은 속도로 가다, 시선이 닿는 곳에 멈출 때 비로소 발견된다. 카메라의 화각을 바꾸듯 시야를 좁히거나 넓히면 이 길의 풍경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본격적으로 7번 국도를 타기 전, 잠시 길을 빠져나가 들른 옥계계곡 또한 비경이었다. 길을 갈아탄 지 불과 20여 분만에 눈앞에는 아득한 수평선 대신 기암괴석과 울울창창한 산들이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한다. 차를 침수정(枕漱亭) 앞에 세웠다. 팔작지붕 침수정 아래 계곡 물빛은 과연 이름답게 쪽빛이다. 저 황홀한 물빛에 젖어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이 정자에서 시상에 빠져들었을꼬.       


ⓒ 스침

# 선계(仙界)와 마주치다   


- 다시 차를 몰아 강구항으로 향했었다. 항구에 접어들자, 작은 어시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흔히 보는 거무튀튀한 해삼과 달리 강렬하게 붉은빛이 도는 홍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주머니 말이 회를 쳐도 좋지만, 채소와 함께 동백기름을 둘러 무쳐먹으면 그만이란다. 또 알게 된 사실 하나. 대게는 ‘큰 게’가 아니라 8개의 게 다리가 대나무처럼 곧다 하여 죽해(竹蟹), 즉 대게란다. 









ⓒ 스침
ⓒ 스침

- 풍광에 취하다 보면 갑자기 만사가 심드렁해질 때가 있다. 어지간해서는 감흥이 쉽게 일지 않아서다. 하지만 이 길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다. 바다가 시들해지면 길을 꺾어 산으로 눈을 씻고, 그러다 싫증 나면 다시 바다 앞에서 턱을 괴면 된다. 키가 훤칠한 적송과 아득한 수평선의 교차, 세로와 가로의 번갈음은 나처럼 무엇이든 잘 질리는 자들에게 적합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 스침

 # 사람으로 완성되는 정자(亭子)


- 머무를 '정(停)'자를 풀면 정자에 사람이 서 있는 형상이다. 무릇 사람은 정자에 올라 상념에 잠겨야 한다는 뜻이리라. 7번 국도에서 이름난 정자를 찾는 일은 일축에도 들지 못한다. 강원 고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까지 헤아리기 어렵다. 


7번 국도에 산과 바다처럼 거대한 풍경만 있는 건 아니다. 길섶에 야생으로 넉넉하게 핀 송엽국(松葉菊, 사철채송화)은 또 얼마나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가. 이 녀석 남아프리카가 원산지라니 참 멀리도 왔다. 한참은 서두르고 또 때로는 늘쩡거리기도 하면서 길을 갔다. 그렇게 다다른 양양의 남애항. 이 항구는 영화 <고래사냥>(1984)의 촬영지였다. 젊은이들에겐 소환되지 않는 과거겠지만 나 같은 늙다리에겐 버리기 아까운 추억이다. 

 

- 몇 해 전, 강릉 선교장에 들렀다가 활래정 앞에서 들었던 노인의 귀띔이 떠오른다.

  “이 무궁화나무가 광복 기념으로 식수한 건데, 이제 수령이 다 했으니 참 세월이 무상하죠.”

듣고 보니 밑동이 꽤나 굵었다. 세상에 조금 더 머물기 위해 흙을 잔뜩 움켜쥐었나 보다. 나도 이 길을 떠나기 싫어 자꾸 발바닥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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