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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앨리스 03화

이상한 나라의 시간 I

토끼 굴속으로

by 유하




시간. 시간이 갖고 싶다.








월트 디즈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① 토끼 씨를 쫓는 앨리스 & ② 회중 시계를 들고 바삐 뛰어가는 토끼 씨.




나는 어린 앨리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현실 속에서 시간은 움직이는 줄도 모르게, 나른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동그란 회중시계를 보며 바삐 달려가는 토끼 씨를 발견한 순간부터 앨리스의 정신과 감각이 곤두서며 시간은 속도를 빠르게 올린다. 말도 제대로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늦었어!"를 남발하며 깡충깡충 뛰어가는 흰 토끼를 집요하게 쫓는 앨리스. 그와 말 한 번 해 보겠다고 토끼 굴속으로까지 기어 들어간 앨리스는 더 깊숙한 지하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이어서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이라 손꼽는 장면이 펼쳐진다. 상식에 따른다면 영화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휘리릭 지나가야 마땅한 앨리스의 추락. 하지만 이 추락은 아주 느리다. 주변에 스탠드, 거울, 책, 괘종시계, 흔들의자, 벽난로, 세계 지도와 같은 사물들이 둥둥 떠다니고 앨리스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할 정도로 느리다. 이 느린 시간의 속도로 인해 앨리스는 급작스레 일어난 사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대신 자신 안에 가득한 호기심을 마음껏 내비칠 수 있다.




토끼 굴속으로 낙하 중, 앨리스가 ③ 전등을 킨다. ④ 거울을 본다. ⑤ 책을 들고 괘종시계를 관찰한다.




이렇게 지나치게 느린 속도와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의 빠른 속도가 번갈아 가며 이상한 나라의 시간을 지배한다. 전자의 흐름으로는 앞서 언급한 토끼 굴안에서의 추락에 더해, 'A-E-I-O-U'를 부르며 알파벳 모양의 담배 연기를 내뿜는 애벌레의 느릿느릿한 말투, 또는 앨리스가 묻는 말에 뜸을 들이거나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며 제대로 된 답변을 회피하는 이상한 인물들의 답답한 대화 방식, 앨리스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지연 등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회중시계를 수시로 확인하며 항시 뛰어다니는 흰 토끼의 시간, 앨리스의 변신, 이상한 나라에 사는 인물들이 앨리스를 붙들고 빙글빙글 도는 재빠르고 혼란한 속도가 있다. 후자의 속도는 영화의 후반부, 하트 여왕과 카드 병정들이 앨리스를 추격하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처럼 이상한 나라의 시간은 대조적인 두 가지 속도가 맞부딪치며 발생시킨 신비로운 현상들로 구성된다. 이 시간을 현실의 정량적인 시간 관념과 체계로 나누기는 어렵다. 트위들 디(Tweedle Dee)와 트위들 덤(Tweedle Dum)이 앨리스에게 들려주는 '바다코끼리와 목수' 이야기의 배경처럼, 해와 달, 낮과 밤이 공존하는 바다의 초현실적인 경관처럼 각기 다른 시간의 흐름이 병립하는 것이다. 아주 빠르거나 아주 느리거나. 이 분열된 리듬은 사실 같은 속성을 공유하기도 하는데, 중도를 지키는 대신 열렬하고 절실하며 지루할 틈이 없다. 다시 말해, 두 리듬은 모두 시간에 대한 뜨거운 열중으로 통합된다. 시간을 향한 바다처럼 깊은 몰입, 토끼굴의 길이만큼이나 깊숙한 탐구가 앨리스의 세계를 찰랑인다.




⑥ '바다코끼리와 목수' 이야기 속, 한시에 공존하는 해와 달이 된 트위들 디와 트위들 덤의 얼굴.








느리게. 나는 다시 토끼 굴속으로의 추락으로 돌아간다. 아니, 나는 그것을 추락 대신 '낙하'라고 지칭하려 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비행'이다. 추락 아닌 낙하 또는 비행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이 과정은 앨리스 혹은 별난 일들이 일어나는 주변 환경에 대한 가치를 결코 하락시키지 않는다. 굴속으로 떨어지며 앨리스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다이너(Dinah)에게 굿바이 인사를 나누는 예의와 당찬 여유를 보인다. 흰 앞치마에 포획되어 얌전한 자태로 있던 그의 하늘색 드레스는 낙하산이 되어 앨리스를 보호해 준다. 낙하하는 과정을 포함해 이상한 나라를 배회하는 모든 과정에서 앨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비상한 상황들에 주눅들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자신과 세계를, 신선한 능력과 사물을 천천히 발견하고, 탐구하고, "이상하네. (I wonder....)"라며 생각에 잠긴다.




살바도르 달리, 디즈니, 도미니크 몽페리, <데스티노>(2003) : 소라 껍데기와 여자의 낙하 장면 ①, ②, ③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며(국내에서는 이 버전을 문예출판사에서 올해 2022년 출간했다), 디즈니와도 친분을 유지하며 많은 영감을 주고받았다. 1946년 달리와 디즈니가 협업을 시도했던 <데스티노 Destino>는 제작이 무산되었다가 감격스럽게도 두 거장의 사후인 2003년 도미니크 몽페리(Dominique Monféry, 1965~)의 감독 하에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꽤나 느긋하게 이루어지는 낙하 장면이 등장한다. 나선형으로 뒤틀린 여자의 몸체로 형상화된 건축물, 그 꼭대기에 걸쳐 있는 소라 껍데기. 건축물에 배치된 기이한 조각상에 여자 주인공의 옷이 걸리고, 그는 나체인 상태로 소라 껍질 안에 쏙 들어간다. 그러자 소라 껍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체크 무늬 바닥을 향해 넉넉한 속도로 떨어진다. 무용수인 주인공은 낙하 중에 딱딱한 소라 껍데기로부터 뛰쳐나와 우아한 몸짓으로 부드럽게 공중제비를 한다.



몽페리 감독은 <데스티노>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이며, 이들이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만 비로소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이 사실을 여자 주인공이 옷을 입고 있지 않는 상태나 영화 내내 각기 다른 드레스를 입는 모습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다. 여자의 낙하는 그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꾸는 꿈속에 위치한다. 또한 이 낙하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드디어 그 옷을 찾기 바로 직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아직 사랑도 정체성도 찾기 전이지만, 그래서인지 여자는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로 가뿐하게 꿈의 세계를 누빈다. 여자가 홀로 공중을 부유하는 찰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시간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닐까.




<데스티노>(2003) : 여자의 낙하 장면




꿈과 이상을 중심으로 경험하게 되는 시간의 늘어짐은 지루한 현실 속 시간의 늘어짐과는 분명 다르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강력한 몰두를 요구하며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이상주의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시간을 늘어뜨린다는 것은 시간을 느낀다는 것. 온 마음과 감각을 다해 음미한다는 것. 흘러가는 영상 속의 이미지, 더 나아가서는 삶 속의 한 장면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경험,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의 편협한 기준으로는 '추락'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 안에서마저 이상주의자에게는 흥미로운 여정이 된다. 그것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규정되고 평가되든, 관찰하고 배우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삶으로부터 재미를 느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이상주의자에게 추락은 권태로운 현실의 짜릿한 변주로, 기발한 무용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로, 높고 넓은 곳을 향해 도약하는 낙관적인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진정한 이상주의자는 절망적인 추락을 우아한 희망의 비행으로 전환시키고야 만다.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시간이 움직이는 법칙, 이상주의자의 본질적인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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