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셔 고양이는 앨리스의 편인가, 적인가?
가끔 고양이 꿈을 꾸곤 한다. 선물 받은 상자 안에 새끼 고양이들이 한가득 들어 있는 꿈을 꿀 때면, 내가 이토록 누군가를 귀여워하고 보살펴 주고 싶어 했나 그런 생각이 든다. 반면, 섬뜩했던 기억의 고양이 꿈도 있다. 번뜩이는 두 눈이 박힌 고양이의 머리를 목격한 꿈. 주변의 배경이 어땠고 고양이의 몸이 실제로 없었는지는 생각이 잘 안 난다. 머리의 크기가 작았는지 컸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몸이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고양이의 머리, 단지 그것만이 나의 시각을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본 것은 체셔 고양이었을까. 어린 시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디즈니의 영화로 처음 접했던 나는, 미친 정신을 대변하듯 자주색과 보라색이 왔다갔다하는 줄무늬로 뒤덮인 그의 형체를 떠올린다. 체셔 고양이의 머리와 몸체는 사라져도 양볼 끝으로 시원하게 쭉 찢어진 그의 입은 끝까지 남아 초승달이 된다. 아, 그 반대였던가. 어찌 되었든, 미소가 달이 되고야 마는 존재라니! 미소 안에 담긴 괴이함,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뭐가 됐든, 그는 '고양이'다.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꿈을 꾼 이후,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서 존 테니얼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다시 그 꿈의 장면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공중에 동동 떠 있는 고양이의 머리.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나만 알고 있었던 내밀한 꿈이 시대를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동화의 한 장면과 들어맞는 경험. 참으로 묘(猫/妙)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고양이 머리 주위에 모여든 군중 속에서 사형 집행인, 왕과 여왕은 우스꽝스러운 논쟁을 벌인다. 사형 집행인은 몸이 없는데 목을 벨 수 없다고 발언하고, 왕은 머리가 있으니 목을 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왕은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현장의 모든 이들을 사형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논쟁이 일어나기 직전, 앨리스는 고양이의 머리를 보고 다가온 왕에게 체셔 고양이를 자신의 '친구'로 소개한 바 있다. 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한다. "아니야, 그 saeggie는 너의 친구가 아니야."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미친 동물들처럼 내뱉는 알쏭한 말들 하며, 다른 동물들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듯 바짝 약을 올리는 제스처가 보통 얄미운 것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캐릭터다. 여왕과의 크로케 경기 중에 몰래 나타나 앨리스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여왕을 자빠뜨린다. 분노에 휩싸인 여왕은 앨리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다. 비슷한 행각이 앨리스의 죄를 묻는 법정에서까지 이어지며 상황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건 디즈니 버전으로, 원작에서 체셔 고양이는 앞서 언급한 사형 집행인, 왕과 여왕의 논쟁 장면에서 사라지고, 이후 법정에서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현실 속에서 '고양이'라는 존재 자체는 앨리스가 애정을 쏟는 무해한 대상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고양이는 앨리스가 키우는 '다이너'다. 앨리스의 두 번째 이야기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다이너는 엄마 고양이로 등장하며, 검은 아기 고양이 '키티'와 하얀 아기 고양이 '스노드롭'이 새롭게 출연한다. 현실 세계에서 고양이들은 앨리스가 끊임없이 조잘대며 자신의 이야기와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또 이들에게 앨리스는 잔소리하고 가르치는 부모나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고양이는 변신을 거듭하는 신비로운 존재다. 이상한 나라의 체셔 고양이는 현실의 다이너로부터 출발했을지 모른다. 키티와 스노드롭의 경우, 꿈에서 깬 앨리스가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했듯, 거울 나라에서 각각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으로 둔갑한다.
앨리스와 고양이의 이런 친근한 관계로부터 체셔 고양이를 이해해 볼 수 있을까?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디즈니 버전에서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 흰 토끼의 행방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는 이상한 나라의 기본적인 법칙,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는 진실을 알려 준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가 미쳤다는 자각도 있다. 체셔 고양이가 이상한 나라의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유독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갖는 데에는 신비로운 재주와 거대한 머리도 한몫 했겠지만,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앨리스와 대화다운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도 있다.
디즈니 영화에서는 빠진 원작의 내용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에게, 앨리스가 안고 있던 아기가 어떻게 됐는지 질문한다. 또 아기가 돼지로 변했다는 앨리스의 답변을 재차 확인하기도 한다. 여전히 불분명하긴 하지만, 앨리스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스스로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그는 호기심을 갖고 앨리스의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질문하며 대답한다. 체셔 고양이에게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에 따라 터무니없는 질문과 비이성적인 말들을 분출하는 다른 동물들과 상대적으로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정신없이 불쑥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앨리스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한다. 이어서 그는 크로케 경기에서 앨리스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결국 그 약속을 지킨다.
아, 머리야. 그렇다면 대체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에게 어떤 존재란 말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군인지 적군인지가. 친구인지 적인지를 선명하게 분리하는 것만이 답일까? 의심스러운 몇 가지 구석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상대를 '친구'라 지명하는 것. 그 마음이 상대의 좋은 면면들을 기억하고 이유 있는 선택을 했을 것이라 신뢰하며, 먼저 믿음을 내어 주는 것. 그다음에 관계의 의미를 찬찬히 고려해 보는 것. 실은 이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처음에는 체셔 고양이를 '친구'라고 부르는 앨리스가 스스로를 다치게 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훅 자란 내가 어느새 타인을 믿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본다.
인정한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에 대한 나의 기본 전제는 불신에서부터 출발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관계에 있어 거리감은 꼭 필요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나를 상처로부터 지켜 주기도 했지만, 외롭게도 만들었다. 사람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내가 좋아하는 상상력과 창조적인 힘, 심오하고 아름다운 예술로 채웠다. 가까운 이웃에 대한 사랑 대신 드넓게 뻗어 가는 인류애를 키웠다. '글' 하나만 보고, 자유롭고 허전하게 공중을 유영하는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이 꼭 좋고 나쁘다고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난(至難/持難)한 나날들의 회상 속에서 자연스레 고백하게 될 뿐이다. 불신은 머리다. 지상에 맞닿은 몸체로부터 분리된 차갑게 새까만 머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절대 뜨겁거나 따스한 마음의 문제일 수 없다. 불신은 머리에서 시작하고 머리에서 끝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선구자로 받아들였던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의 그림들은 유난히 '머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드러낸다. 특히 '검은색(Noirs)'이라고 스스로 지칭했던 초기 목탄화들에서는 신, 인간, 그 외의 동물과 규정할 수 없는 생물 사이의 경계를 괴기스럽고 혼란하게 오가는 머리들을 볼 수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커다란 수호신의 머리가 되기도, 스스로의 손에 의해 움켜잡힌 채 하늘을 나는 악마의 머리가 되기도. 이 그림들을 보고 있다 보면, 어디에 있는 누구의 머리인지보다도 그것이 '머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해 보인다. 자유롭고 허전하게 떠다니는 머리. 자유롭고 허전하게 채우는 머리. 단지, 머리.
아, 머리야. 문제는 '머리'였던 것이다. 공중에는 새까맣게 탄 불신이 증발하고 남은 머리통만이 둥둥 떠 있다. 머리 그 자체만을 지그시 올려다 본다. 친구이기 전에, 적이기 전에 '사람'이다. 혹은 '고양이'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말을 갖다붙여 분류하기 전에 본질적인 '존재'라는 거다. 가능하다면, 조금의 여유가 허락한다면, 현실이 보다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이상주의자라면, 상대를 나의 '친구 분류표'에서 동그라미를 치거나, 100점을 주거나 30점을 주거나, 아예 제거하기 이전에, 한 명의 존재로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나의 '이해'를 주는 것이다. 준다. 이것은 분명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까짓것 주지 뭐. 주지 않는다면 관계는 그걸로 끝이다. '해피 엔딩'은 없다. 하지만 준다면 성장과 변화, 색다른 반전을 향한 눈부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상주의자를 살게 하는 것은 이 문을 여는 일에 있다. 고로 이상주의자에게는, 주는 것이 덜 괴로운 방식이다. 내가 때때로 괴로웠던 진짜 이유는 내 안에 가득한 불신 때문에 순수하게 꿈꾸는 이상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1895~1952)도 「올바른 정의 Bonne justice」(1951)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물을 빛으로 꿈을 현실로 적을 형제로 바꾸는 것", 그것이 "유연한 인간의 법칙"이라고. 그것은 이상한 나라의 마법, 참된 이상주의자의 법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