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꿈속 동물들, 그들의 시선
'왜 동물일까?'라는 질문을 이어가 보고자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상한 나라는 왜 동물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에 대해 첫 번째 이유로 이상한 나라의 이상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꾸려 내기 위함임을 꼽았고, 두 번째 이유로는 불통의 소통 방식을 표현하기에 동물들이 적절한 존재감을 발휘한다고 제시했다. 이제 세 번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상한 나라는 어린 앨리스의 꿈이다. 어린 아이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동물들'이라는 소재에 접근해 보도록 한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동물 꿈을 훨씬 더 많이 꾼다는 연구도 있다. 그 이유는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아이들이 현실에서 본능적 욕구들을 제어하기 위해 더욱 빈번하게 고군분투하기에 그러한 갈등과 억압이 꿈에서 표출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꿈' 하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우울증, 강박증과 더불어 늑대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던 젊은 러시아 귀족 세르게이 판케예프(Sergei Pankejeff, 1886~1979)는 프로이트를 찾아간다. 그는 겨울을 배경으로 창밖의 호두나무 위에 여섯에서 일곱 마리 정도의 흰 늑대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는 악몽을 꿨다고 고백한다. 프로이트는 판케예프를 '늑대인간(Wolfman)'이라고 부르며, 그의 꿈을 부모의 성 행위를 목격 한 뒤 외상적으로 회상되거나 환상을 보게 되는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으로 설명한다. 아이는 처음 성교를 목격한 당시에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후적으로 꿈을 통해, 또 그 꿈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해석에 이르게 된다. 판케예프가 그린 꿈 그림에서 늑대들은 뾰족하게 가지를 세운 나무와 하나의 몸체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찬찬히 보니 오른쪽 하단의 나뭇가지도 눈에 들어온다. 마치 꾹 닫힌 눈꺼풀 같다.
늑대인간의 꿈이 '원초적 장면'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보다도, 저 흰 늑대들의 시선에 주목하고 싶다. 그들을 한 데로 묶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일제히 한곳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 이 시선이 그들을 하나로 응집시키고 하나의 지점, 즉 관람자가 위치한 지점을 고요히, 그러나 매섭게 몰아세운다. 이상한 나라의 다소 위협적이면서도 기이한 공기는 이 시선으로부터 나온다. 이 시선을 구체적으로 감각하기 위해, 흰 토끼를 쫓던 앨리스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숲에 둘러싸이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는 어디선가 나타난 트위들 덤과 트위들 디가 분신술을 쓴 것처럼 여럿으로 불어나며 나무 뒤에 숨어서 일제히 앨리스를 바라보는 장면도 있다. 그 모습이 훨씬 장난스러운 느낌이긴 해도 트위들 형제는 경계를 낮출 수 없는 낯선 존재들이며, 나무 위에 주렁주렁 달린 흰 늑대들이 쏘아대는 시선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가 어린 아이의 꿈이라면, 이 공격적인 짐승의 시선은 아이의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대상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것은 곧 부모의 시선이다. 아이의 세상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가족, 부모의 언어와 세계 안에서 아이는 뛰놀고, 눈치도 보고, 배운다. 아이는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모의 권력에 압도당한다. 그렇게 억압되거나 좌절된 아이의 소망과 본능, 저항에 대한 열망과 권위에 대한 도전, 자신을 억누른 부모에 대한 사랑과 분개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은 꿈속의 동물들로 다시 깨어난다.
앨리스는 이 권위적인 시선에 때때로 억눌리기도 하지만, 참 야무지고 대견하게도 그것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며 호기심을 잃지 않고 이상한 나라를 탐색한다. 심지어는 그 시선에 직접적으로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기까지 한다. 앨리스의 능력은 몸의 크기가 아주 작아지거나 커지는 변신을 통해 발휘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시선이 앨리스를 규정하거나 억압할 수 없도록 한다. 유연성.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분출하는 힘의 다른 말이다. 그것은 동물, 혹은 자연이나 새로운 세상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에 동물을 마주한 아이들은 맑은 두 눈을 반짝거린다. 마냥 무섭거나 싫다고 배척하기보다는 두려움과 어색함을 안고 조금씩 다가가기를 시도한다. 더 큰 용기가 있다면, 만지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긴장감을 극복하지 못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안전한 엄마 품속으로 얼른 뛰어갔더라도, 호기심과 미련 때문에 동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동물원이나 공원에서 그런 아이들을 많이 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매우 유연하게 느껴진다. 아주 유사한 장면이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등장한다. 몸집이 작아진 앨리스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개를 가엾게 여기기도, 무서워하기도, 귀여워하기도 한다. 깜짝 놀랐다가, 개를 향해 나뭇가지를 내밀고 숨기를 반복했다가, 도망쳤다가. 읽다 보면 웃음이 난다. 디즈니 버전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했던 미야자키 하야오(みやざきはやお, 宮崎駿, 1941~)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에서는 앨리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은 한 소녀가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앨리스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마녀 유바바와 그의 아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인형의 탈을 쓴 것처럼 커다란 얼굴의 공작 부인과 쉬지 않고 우는 아기를 연상케 한다.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설정을 통해서도 공작 부인의 아기가 앨리스의 품에서 돼지로 변하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의 크기는 변해도 그는 절대 돼지로 변하지 않는다. 돼지로 변하고 변하지 않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권위적인 관점에 의해 통제되고 통제되지 않고의 차이는 아닐까? 즉, 주체성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인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건물 내부의 독특한 디자인을 통해 통제하려는 시선에 대한 주체성의 대항을 표출한다. 내부의 광경은 원근법을 무시하거나 벽이 휘거나 들쑥날쑥하게 생겼다. 보는 사람의 거리감에 따라 사물의 크기가 잘 조절된, 매끈하고 반듯하게 묘사된 구조가 아니다.
'원초적 장면'으로 읽히곤 하는 막스 에른스트의 <주인의 침실 The Master's Bedroom>(ca. 1920) 역시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제목에서부터 '주인'의 침실을 지칭하며 주체적인 시각을 표방한다. 에른스트는 여러 가지 동물들과 사물들을 묘사한,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찢어 그 위를 부분적으로 과슈로 칠했다. 그 과정에서 양, 곰, 고래, 박쥐, 뱀 등의 동물들과 탁자, 침대, 장롱 등의 사물들,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가 선별적으로 남게 되었다. 선택적으로 과슈층 위로 떠오른 동물과 사물은 에른스트가 추가로 그려 넣은 공간에 굴하지 않는다. 즉 이 공간이 주장하는 원근법의 지배에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 서로의 거리감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탁자와 침대, 장롱은 동동 떠 있는 것 같고, 마루는 딱딱한 대신 고래가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묽다.
아이의 꿈속에서 다시 깨어난 동물들. 위협적인 짐승들의 권위적인 시선. 아이의 반란, 앨리스의 반란. 어리지만 용맹한 앨리스는 겁 먹은 성인이 된 이상주의자들에게 외친다. 현실의 위압에 절대 굴복하지 말라고. 아, 이미 굴복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이곳은 억압의 층위를 뚫어야만 피어오르는 꿈의 세계. 당신의 눈꺼풀이 꾹 닫힌 순간, 이미 반격은 시작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