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걱정마

by 유영원


나는 취직을 늦게 한 편이다. 사회로 한 발짝 나서기 전에는 이곳저곳 발만 걸쳐보며 유랑하듯 보낸 몇 년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언론사 준비를 할 때에는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회사들 덕에 대학과 그 주변을 벗어나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었다. 이맘 때 쯔음, 쨍하게 맑은 겨울 날, 정오 무렵 글쓰기를 마치고 안국동을 내려오며 풍경을 구경하던 날들이 그 시절엔 연이어 있었다.


도시 사이 사이에 숨은 시험장들 - 주로 고등학교가 많았다 - 의 좁은 책상에 긴장한 채 앉아서, 드디어 시험지들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건 개요짜기도 생각하기도 아니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허리를 핀다. 연필을 손에 감고 시험지 제일 위에 "잘 쓰려고 하지마" 라고 대문짝하게 썻다. 그리고, 으레 그 뒤에는 더 큰 글씨에 느낌표까지 붙여가며 적었다. "그냥 써!". 몇 십편의 글을 완성하며 처음의 흥분은 사라져가고 점점 더 내가 누구 말마따마 '자판기'처럼 여겨질 때. 스터디에서 한 번 '대박'을 치고 나서 더 잘써야 한다는, 동료이자 경쟁자들의 눈치를 보며 압박을 느낄 때. 졸렬한 솜씨로 이리저리 꾸며놓은 장식 사이로 '맥아리가 없네요'란 비평이 들이 꽂힐 때. 그래서 영영 구렁텅이로 굴렁굴렁 빠져버릴 것 같을 때, 심호흡을 했다.

"잘 하려고 하지마, 그냥해!"


말이란 건 참 신기해서 그렇게 주문을 외워 놓으면 나는 곧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부질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쓰자. 언제부터 내가 글 잘쓰는 사람이었나. 깨끗한 마음으로 논제를 여러번 읽는다. 수많은 전개 가능한 뒷 이야기 중에 제일 진심과 닮은 아이디어를 꺼낸다. 다듬고 다듬어서 글을 내는데 연필로 한번 쓰고 볼펜으로 재빨리 퇴고를 하면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 식으로 오늘도 자판기의 일을 훌륭히 해내었다 자뻑하면서 음료수라도 뽑아마시며 남산 어귀를 날듯이 내려왔었다.


어쩌면 나는 그 때 마시던 그 상쾌한 공기에 빚을 지고 있다. 완전한 어른도 아이도 아니던 시기, 앞으로 펼쳐질 일이 무엇인지 모른 체 그저 유예하기만 하던 그 시절의 평온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서울 구경 말고도 남는 게 없는 건 아니었던 것이, 난 참 건강해, 난 참 가치있는 사람이야, 싶다가도 불현듯 꿈에서 깬듯이 머리가 차가워질 때, 아직도 그 때의 누군가가 마음속에서 말을 걸어주기 때문이다. 그냥 해. 잘 하려고 하지마. 그냥 해.


동지가 막 지났지만 곧 봄이 올 거란 걸 안다. 맑은 날엔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설사 모든 게 다 괜찮아지지 않더라도 나는 정말 괜찮아. 그러니 그냥 한다, 그럼 곧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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