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불안은 나의 벗

by 유영원


나는 언제나 늦는 사람이었다. 교복을 줄여 입는 것도 가고 싶은 대학을 알아차리는 것도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는 날도 친구들보다 반 발짝 늦었다. 내가 분노를 참는 법을 배우며 테두리에 맞춰 오므라질 때 이미 친구들은 대리님이라고 불렸다. 이제 회사란 걸 알겠다 싶었을 때 친구들은 부하직원을 책임졌다. 한번 벌어진 시차는 좁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나를 남겨두었다.


어느 순간 친구들은 상담을 받는다고 이야기해왔다. 약을 처방받아 먹는 친구들도 있었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고백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처음엔 그들이 앞서 맞이한 고난에 깜짝 놀랐으나 몇 년 후 나 또한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 일은 차라리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마치 우리가 다 같이 같은 학교를 다니며 하나 둘 대형 학원으로 옮겨가거나 하나 둘 PMP를 사서 비슷비슷한 인터넷 강의를 듣던 시절처럼.


나의 병은 커다란 모니터 화면과 함께 왔다. 우리 회사는 1달에 한 두번 정도는 야간 근무를 해야하는데 밤새 감금되는 방의 전면에는 커다란 55인치 TV가 네 대 달려있어 회사 경계부분의 각기 다른 부분을 잘게 쪼개 보여주었다. 그 아래에는 8대의 작은 모니터에 실시간 속보 따위 뉴스가 떠다녔다. 회사에서 일한지 4년 동안 단 한번도 그 화면들을 통해서 무언가 유의미한 일이 일어난 적은 없다. 그저 고양이가 드문드문 담을 넘을때나 삑삑 하는 소리로 잠깐 주의를 끌 뿐이었다. 그건 마치 그들이 무언가를 계속 비추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새삼스레 알리는 경보음 같았다.


그 스크린들의 멈추지 않음이 견디기 어려워져서 그 방을 뛰쳐나간 날. 불 꺼진 사무실로 달려가 한참을 숨 고른 날. 나는 상담을 시작했다.


나의 불안은 장애라는 이름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진 않았다. 정의를 내리자면 도저히 도피할 수 없는, 확정적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끌 수 없는 모니터 화면 하나 내가 무심코 사용한 플라스틱 컵 하나가 온 세계의 끝이 되고 모두의 죽음이 된다는 확증적인 예언, 그런 것들이 모여 불안이 된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마치 막다른 길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뒤어내리고 싶은 감정이 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불안이 된다는 말로 나를 또 다시 깊은 생각에 빠트렸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샴푸통이 플라스틱인 것이 싫어서 비누 샴푸를 쓰다가도 거품이 잘 나지 않아 다시 샴푸로 바꾸고 쿠션 대신 유리병에 든 파운데이션을 사려다가 불편해서 다시 쿠션 쓰고 비닐봉투를 줄이는 데 실패하고 썩어가는 재질로 사고 이 정도면 됐다고 자위한다. 이렇듯 좀스럽게 애를 쓰다가 가끔은 배달을 시키고 쓰레기를 산처럼 만들고 립스틱을 사 모으고 잘 입지 않을 옷들을 쇼핑한 뒤에 소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날에는 그저 또 방 안으로 숨는다. 내 고양이가 먹이와 모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게 유일한 위안이 된다.


만약 다른 삶을 선택했다면 나는 불안에서 헤어나왔을까? 좀 더 안정된 직장을, 좀 더 많은 돈을, 나를 위안해줄 배우자를 선택했다면 나는 해방되었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멀티탭 스위치를 끄고 다니는 아이였다. 냉장고가 웅웅거리는 것이 싫어서 코드를 뽑았다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그때 나의 불안은 그저 냉장고만한 크기였지만 이제 나의 불안은 수십대의 모니터 화면만큼 커다래졌다. 나는 어쩌면 그저 소모하는 여름, 과잉과 낭비의 시절이 지나고 수확의 시기가 돌아오는 걸 감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쥔 패였던 시간이 한 장 두 장 떨어져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앞서 우울해 했던 친구들은 이제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간 것만 같고, 매사 반 발짝 뒤쳐졌던 나는 손에 쥔 무엇도 없이 그저 끝없이 져가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선생님에게 나는 여름에는 외출을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만을 위해 방에 에어컨을 켜두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내가 말했다. 다만 언젠가 인버터 에어컨의 원리를 알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구원되었다고 고백했다. 희망이 있었어요, 뭐냐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나의 희망은 부질없는 소리를 매일 듣는 선생님 같은 사람에게도 도저히 이해받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불안과 단둘이 덩그러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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