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책을 한 권 샀다. 토베 디틀레우센의 <청춘>이다. 생일 선물로 책을,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선물할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다. H는 그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다.
H를 처음 만난 건 몇 해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다. 그런 수업에서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글을 통해 서로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우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H였다. 몇 주간의 과제와 쉬는 시간의 대화를 통해서 나 또한 H를 발견했다. 마지막 수업 날 우리는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고, 몇 달 뒤에는 밥을 같이 먹으며 서로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종강 후에도 수업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관계였다.
H의 블로그를 읽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그저 여러 지인 중의 하나로만 생각했었다. H는 아주 가볍게 블로그 이웃이 되자고 말해왔기에, 나는 그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블로그에 접속한 뒤, 나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 차단과 차단 해제, 집착과 회피가 버무려진 그녀의 연애사를 읽게 되었다. 그 속에는 여성으로서 <팔리고 싶다>는 날것의 욕망과, 그 욕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조와 해부가 있었다. H의 내면이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그 적나라함과 시간과 함께 쌓인 두께에 나는 압도되었다. 일종의 행위예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판단을 유보한 채 나는 그저 관객이 되었고, 매번 업데이트되는 일기를 읽을 수록 더욱 H의 재능에 존경심을 품었다.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들린 몸짓을 보여주는 무대의 퍼포머에 대한 존경심과 유사했다.
그래서 H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 나는 꽤나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H에게 주는 선물은 내가 품은 존경심에 합당한 동시에 나의 고상한 취향도 적당히 드러내야 했다. 토베 디틀레우센은 그 무렵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어린 시절>의 저자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낱낱이 해부하는 문장이 시적인 동시에 매정하게 가차없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청춘>을 선물로 고르면서도 H가 디틀레우센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내 취향은 담백한 편인데, H의 취향은 관능적인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관능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어린 화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 뒷편과 여자들의 이야기가 있을 뿐. 디틀레우센의 거리두기나 섬세한 지성이 H에게 어떻게 가닿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H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물가에 앉아 관찰하기보다는 호수 속에 풍덩 빠지는 사람에 가까울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H에게 디틀레우센의 <청춘>을 선물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선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알면서도. 싫어한다거나 격하게 비판한다거나 하는 반응에는 개의치 않겠지만, 지루해하거나, 읽어보았냐는 질문에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반응에는 분명 상처받을지라도. 어떤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디틀레우센의 <청춘>의 소개 페이지에는 “욕망의 거래와 정산”이라는 어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디틀레우센이 자신의 청춘을 어떤 식으로 묘사했을지 상상했다. 청춘이 가진 가치와 그 거래를 가차없을 정도로 냉정한 저울에 달아보았을 것이다. H는 디틀레우센의 계산법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H의 관객으로만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코멘트를 달고 싶었다. [좋아할 것 같아서 샀어요] 라고 말하며 내가 그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넌지시 단서를 남겼다. 나와 내가 좋아하는 책, 그리고 H의 접점이 세 겹으로 가지런히 포개지는 상상을 했다. 내 해석을 상대가 이해하기를. 더 나아가 나를 읽어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내 세계의 일부가 그녀에게 투영되기를 바랐다.
그녀의 블로그를 바라보는 관객으로 있는 동안, 나는 우리의 우정을 지속시킬 결정적 요소를 발견했던 것이다. 어쩌면 글로 맺어진 우정에는 존경심뿐만 아니라 일종의 질투가 언제나 끼어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영토를 장악하고, 내 것으로 덮어버리고 싶다는 호승심과 닮은. 그런 감정이 어쩌면 우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