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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Jan 27. 2021

‘사람을 위한 복직’을 위해
나는 걷는다

김진숙과 함께한 라방, ‘내가 싸우듯이’

내가 돌아가야 할 곳, 

‘사람을 위한 복직’을 위해 나는 걷는다

김진숙과 함께한 라방, ‘내가 싸우듯이’


희망의 버스 사법탄압에 맞서는 ‘돌려차기’는 기획팀이다. 2011년 희망버스에 탑승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아야했던 많은 사람들의 법률지원을 시작으로 위치추적, 계좌추적, 통화내역조회, 벌금폭탄 등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법적 문제 제기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재판은 이어지고 있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돌려차기’는 김진숙과 함께 용기를 더하는 라이브 ‘내가 싸우듯이’를 준비했다. 김진숙은 지난해 12월 30일부터 명예회복과 복직을 촉구하며 부산에서 서울까지 걷는 ‘희망 뚜벅이’를 시작했다. 처음시작은 3명이었다. 둘째날은 10명이었고 셋째날은 20명 그리고 매일 그 숫자는 늘어가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오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희망 뚜벅이 행진이 매우 힘든 시간이겠구나 생각하며 장비를 챙기고 청주로 내려갔다. 힘든 일정 끝에 생방송을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김진숙의 모습에 긴장감도 누그러들었다. 그의 건강상태를 생각하면 무엇도 부탁하기 어려웠지만 이런 자리를 통해 그의 발걸음이 갖는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었기에 조금은 무리일지도 모르는 일정을 부탁했었다.


생방송은 5가지 열쇠말로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나를 알려주마' ‘내 삶의 웬수들’ ‘여성, 여성노동자’ '있다,없다' '승리' 


김진숙 지도. 그는 왜 ‘지도’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일까? 지도회사에 다녔나? 궁금하다 그는 왜 지도인가? 지도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약칭이다. 농담처럼 호칭정리를 시작으로 생방송은 시작되었다.


그는 호불호가 명확한 성격이라고 한다.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어머니를 좋아했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싫어했다고 한다. 남성들이 다수인 조선소 안에서 생활하던 그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는 별로 살아보지를 못했다고도 했다. 존재자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에게는 대상화되던 시대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보다 더 세게 이야기하고 더 강하게 보여야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싫어했지만 애증의 관계라고 할까? 그가 이야기한 ‘으이그 이 웬수들~~~’에 첫 번째는 아버지였고, 늘 함께하고 있는 황이라, 박성호였다. 곁에서 투닥거리고 다시 살아가고 투닥거리기를 반복하는 이들, 그와 가장 밀접한 관계의 사람들. 가족이었다. 


2011년 첫 희망버스가 영도 한진중공업에 도착했을 때 크레인 위에서 성소수자 동지들을 가장 먼저 호명했다.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러줘야 하고 약자를 통해서 세상을 보아야만 세상은 변하고 달라질 수 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걸음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작은 발걸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겠구나. 


그는 귀여움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말한다. 자칭 부채요정으로 불리는 그는 사진을 찍을 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는다. 매우 귀엽다. 

사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다. 그런 그에게 용납되는 사치가 있다고 한다. 중고마켓에서 물건사기라고 한다. 중고마켓에선 많은 물건을 사도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수십, 수백만원짜리 옷을 사야하고 그 옷의 가격이 계급이 된다는 중고등학교 학생실태조사 뉴스가 떠올랐다. 저렴한 가격의 옷을 사면 학교에 가기 부끄러워 해야하는 아이들과 비싼 물건을 사면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겹치는 순간이다.


김진숙의 연설은 감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일까? 타고난 걸까? 연설 잘하는 학원이라도 다닌 걸까?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비결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비결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 하려는 주제가 설정되면 주제에 해당되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듣고, 그들의 이야기가 정리된 자료를 읽고 며칠씩 밤새면서 쓰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그의 비결은 다름아닌 ‘관심’이었다. 


김진숙은 1986년도에 해고되었다. 어용노조에 대해 규탄하고 알리는 선전물을 돌리다 해고됐고, 2003년에 많은 분들이 복직 했을 때도 복직 못했다. 2009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복직시키라고 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해고자다. ‘김진숙의 복직은 시대의 복직이다’ 이런 표현을 요즘 많이 한다. 복직해야하는 이유를 물었다.


“걸을 때 30년 전에 해고 되셨던 분들도 오신다. 그런 분들은 돌아갈 공장이 없다. 저는 그나마 출근투쟁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 분들은 필리핀이고 말레이시아고 공장이 이전해버렸다. 그 분들을 다 법적으로 소송을 도맡아하시기도 했고, 그 분들의 변호를 했던 문재인대통령이 저보다 훨씬 더 억울한 노동자들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옛날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아무도 복직 못했다. 명예회복 차원에서, 선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 분들 복직이 됐으면 좋겠고. 내가 복직하는 게 곧 자신들이 복직하는 것 이상으로 기쁠 것 같다는 말씀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으며 끝까지 함께 투쟁’의 의미를 마지막 질문으로 생방송을 마무리했다.


“크레인에 있었을 때 그 공간은 주익 씨가 살았고, 시신이 누워있었던 공간이다. 

거기서 309일을 먹고 자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신의 상태도 다 봤었고. 

근데 저는 그게 무섭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슬프죠, 아프고. 

근데 저는 그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살고 싶었는지를 알아요. 

어떤 세상을 살고 싶었는지를 안다고 생각해서 싸워나가면서... 근데 울면서 싸우는건 못해요. 울면서 싸우는 건 힘들어서 하루도 못해요. 

제가 30여년을 남들과 다른 일상을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힘들기만 하면 그렇게 못산다.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돈 있는 사람들은 누리지 못할 행복들도 누리고 살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상처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또한 우리를 버티고 견디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곁에, 김진숙 곁에 함께 걷고,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인 것 같다. 많은 분들이 함께 걸어줬으면 좋겠다. 물리적인 길을 걷는 것 뿐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걸어줬으면. 그래서 시대의 복직인 김진숙의 복직을 완성할 뿐 아니라 길에서 만나는 노동자들,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서로 귀를 기울이고 힘을 북돋기는 시간이 되길 소원해본다.


김진숙과 함께, 용기를 더하는 라이브 

내가 싸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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