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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ca n Mar 14. 2021

카페칸에 굳이 입석하는 낭만이란

#1 부전역에서






 주말 저녁, 지인을 따라 예정에 없던 울산행에 동승해 5시간의 도로주행을 했다. 그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와 개인 짐을 정리하고, 일요일에 다시 동행인을 만나러 울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래도 부산에 간 게 아쉬워서 간밤에 '그루브맨 아지트'를 어떻게 찾아 들르기도 했었다)


 열차에 따라 카페칸이나 자유석칸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영남·경상권에서는 이를 만날 기회가 흔치 않았다가 마침 부전역에서 만난 '무궁화호 1944'에는 카페칸이 있었다. 지난주에도 딱 이 시각에 맞춰 탔었으니 같은 열차겠지.


 그전까지는 지금처럼 구체적으로 생각이 정리되지도 못했고, 앞에 쌓인 다른 것들에 급급하다는 핑계로 샛길로 샐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마침 제3자를 통해 카페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제3자란 부전역에서 같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모녀였다.


 두 사람은 승객들이 모두 탑승해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2호차 후면에 마련된 카페칸으로 왔는데, 이 열차는 자유석칸도 없고 코로나19로 입석은 발권이 되지 않는 까닭에 굳이 자기 자리를 두고 무슨 용건으로 왔으려나 싶었다.

더구나 둘의 흘려들어오는 대화로 봐도 정기권 승객마저 아닌 것 같았으니 말이다.

(참고로 내가 카페칸으로 곧장 갔던 이유는 급히 나서서 차에 타느라 짐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고, 객차에서 꼴사납게 사부작사부작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일 일은 없는 흔한 승객이겠거니 넘기려던 차, 모녀의 대화는 내가 잊고 있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열차 중간에는 이런 공간(카페칸)이 있어.

좌석번호를 갖고 있어도 한 번씩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단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

어때, 여기 참 느낌있지 않니?


뜻밖의 대화를 들으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과거의 허상처럼 사라진 '입석'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어제오늘 보니 곳곳에 다시 자리(석)를 모두 사용하는 눈치(100%)긴 했는데, 얼마 전까지도 약 1년이 넘게 좌석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고 비워놓지 않았더나.

그렇다 보니 애초에 없는 자리(입''이라는, '서 있는' 자리라니)는 구체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다가, 처음부터 없던 존재처럼 휘발된 것만 같았다. 아니, 오늘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사라진 줄도 몰랐을 것이다.

글세, 이 열차(무궁화 1944)가 순천에서 포항으로 가는, 그러니까 전라도 남부에서 경상도 북부까지 수개의 강과 도시를 지나는 전시대의 교통망인 까닭에 다소 낭만이 섞여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저 혼자 그렇게 느꼈거나, 그 모녀가 먼저 느꼈든지. 여하간, 그 짤막한 대화를 스쳐 들었던 카페칸에는 모종의 공유감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열차'라는 교통수단은 아주 어렸을 때 친할머니와 함께 탔던 기억 외에는 이렇다 할 경험이 없었다. 그때에도 이사 오기 전 친척들이 모여사는 서울/경기로는 고속버스가 3시간 정도 더 빨랐으니까.


'빨리빨리'와 각양각색의 이유로 효율을 일등 가치로 여기는 '신문명의 이기'부터 접해온 세대로서는 곧잘 이해할 수 없는 구식이었겠지 싶다.


 생각해보면 같이 탔던 그 열차는 시기상 '통일호'였겠다 싶은데, 할머니는 그보다 더 느린 '비둘기호'나, 더 오래전부터 초기 형태의 '기차(氣車)'를 타셨을지도 모른다. 그게 당신의 유년기와 청년기에는 신기술이었을 테고, 새로운 것으로서 익힌 뒤, 점점 대중적이고 익숙한 것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서, 경로우대권을 사용하기 시작하실 무렵 '지하'철로 주요 교통수단이 바뀐 것이 마지막 업데이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게 역시 KTX는 청소년기에 혁신기술로 나온 신문물이었고, 올해에는 푸른빛의 KTX이음이 또 등장했지만, 이런 변천사를 함께 겪어보지 못하고 KTX나 '이음'부터 처음으로 접한 세대에게는 무궁화는 물론이거니와, '새마을' 역시 구식 기술이고, 무궁화 노선을 대체한 '누리로'나 새마을을 대체하고 있는 'ITX'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겠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러는 자기 기준에서 느리고, 불편하고, 정착역이 이해되지 않게 많은 전세대의 열차들이 모두 깔끔한 신형으로 교체되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이렇게 적은 까닭은, 개인적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한 가지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기술의 변화 속에 켜켜이 남은 열차들을, 모두 최신화해서 고쳐야 하는 구버전으로 치부하는 것이 옳은 걸까?라는 것.  KTX라는 기술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2004년, 당시 고3에 진학했던 당시 메모해놓은 게 있어서 옮겨 적어본다.

(수능 준비로도 허덕였어야 하는데, 대체 그때 무슨 생각으로 개똥철학을 적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총알처럼 빨라진 신형 기차들이 선로를 채운다.

사람들은 이동시간이 단축되었다며 좋아할 테지만,
더욱 빠르게 스쳐가면서,
보지 못하는 것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야에서 벗어난 것들은 잊혀지겠지.
창 밖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기회가 줄어든다는 건
참 슬픈 일일 텐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흰 눈을 보면 낭만에 젖기보다
도로가 막히고 일이 힘들어지는 것이 더 걱정되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는 것인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 2004년, 고삼병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십수 년이 지난 오늘도, 만만치 않게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약간의 멜랑꼴리가 섞였던 그때와는 좀 다른 기분이다.

저에게나 그 모녀에게나, 낭만은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지 뭔가.


오늘 무궁화 1944를 타지 않았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느낌있는' 대화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언젠가 계속),


- 2021. 3. 14.(일)




 * 고백하건대 카페칸에서 들었다고 옮겨 쓴 모녀의 대화는, 무슨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마냥 방금 들은 것을 옮겨 적는데도 띄엄띄엄 흘려들어서 그런지 잘 상기되지 않았다. 한 번씩 누군가의 (흥미로운) 대화를 유심히 듣던 개 못주는 버릇도 한물간 건지. 여하간 내가 듣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써놓았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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