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던져지며 새로운 자아를 만들 것을 요구받는다. 과거의 신념과 기준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이제는 우리 스스로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라는 건설 현장에, 다층의 구조를 구현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듯. 불완전한 자신을 온전히 던져 자아를 재구성하고, 혼란의 현실 속에서 기투(企投)의 힘으로 자신을 초월하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기투(Transcendence)는 자기 존재를 미래로 던지며 초월을 향하는 실존적 몸짓이다. 구병모의 단편집 <있을 법한 모든 것>(2023)은 이러한 기투의 본질을 파고들며, 인간의 의지를 담았다.
구병모 작가의 단편집 <있을 법한 모든 것>
그중에서도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 초월을 갈망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화자와, 치매에 걸려 외계의 기억을 붙드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기투를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역시 기투의 여정과 닮았다.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공존과 개척을 통해 운명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그들은 남겨진 잔해 속에서 각자의 욕망과 미래를 개척하고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힘을 얻어간다. 영화와 소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를 향한 의지,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구성 해가는 기투의 심연을 보여준다.
‘니니코라치우푼타’에서 구병모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낸다. 화자는 고령의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존재를 쫓는다. 상상 속 외계인을 찾아가려는 여정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 영원한 것을 찾고자 하는 초월의 행위다.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 준 외계인에 대한 기억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의미의 깊이를 가리킨다. 그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화자의 여정은 단순한 돌봄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과 기억의 본질을 탐색하는, 기투의 치열한 과정이다. 소설 속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실재할 수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상상 속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불확실함이야말로 이야기를 빛나게 한다. 그 존재의 실체는 끝내 드러나지 않지만, 화자는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그것을 쫓는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속삭임처럼, 그의 믿음은 주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의지를 상징하며 기투의 본질을 비춘다.
영화 속 생존자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초월하며 나아간다. 도시가 파괴되고 삶의 기반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생존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걸고 찾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는 온전히 순수한 과정이 아니다. 주인공은 생존의 혼탁한 과정에서 살인까지 저지르며 오해가 엮어진 평가로 주민 대표로 둔갑한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토피아는 완벽한 안식처가 아니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하는 거친 생존의 장이다. 이곳에서 생존자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자기 자리 하나를 지키려는 초월적 투쟁을 벌인다. 깨진 유리와 흙더미 속을 헤치며 생존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다.
한편, 소설 속 화자는 현실을 넘어 어머니가 남긴 상상의 자취, 니니코라치우푼타를 찾아 나선다. 그것이 실재일지 환상일지 알 수 없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그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두 이야기는 모두 불확실한 미래를 끌어안고,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의지를 조명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구병모의 소설은 기투를 통해 더 나은 자아로 향하는 힘을 보여준다. 초고령 사회의 문제와 고립된 미래라는 설정 속에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불확실한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는지, 그 과정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지를 형상화한다. 있을 법한 모든 것에 담긴 기투의 여정은 초월과 자기 성찰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인류의 이야기다.
이렇듯, 구병모의 소설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기투의 의미를 성장시킨다. 소설 속 화자는 환상 속 존재를 쫓고, 영화 속 인물들은 황폐한 공간에서 공존을 선택하며 각자의 길을 찾아간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과 불확실성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며, 그 투쟁이 곧 초월을 향한 인간의 힘임을 증명한다.
피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피투만으로는 삶이 무겁게 내려앉을 뿐, 나아가는 힘을 잃는다. 던져진 조건 속에서 자기 존재를 느끼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기투 없이는 그저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반면, 기투 또한 고립된 채로는 허공에 흩어지는 에너지일 뿐이다.
기투는 피투라는 뿌리에서부터 솟아오르며, 주어진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만 초월의 가능성을 품는다. 피투와 기투가 서로를 보완하며 엮여갈 때, 삶은 무게와 높이를 동시에 견디며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