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세력을 규합하기
세운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접힌 부분을 펴며 테이블의 중앙에 올려놓았다. 글씨가 오밀조밀하게 타이핑되어 있었다. 맨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는 ‘실존 포기각서’였다.
“신체 포기각서, 아시죠?” 세운의 집요함이랄까, 그의 특기는 이런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발산되었다. 간단하게 표현하고는 우리를 둘러보았다. 말의 요지를 각인시킴과 동시에 서로를 결집하는 무언의 힘으로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확실히 이런 방면에 소질이 남달랐다. 이제부터는 혹시 모를 이탈자나 배신자를 차단하기 위한 방비책을 구체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시혼은 활자를 들여다보면서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작성한 초안에는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문구가 몇 개 보였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러했다.
실존을 단죄한다니, 생명력 절단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공포물이 따로 없었다. 대책이 가히 살인적이었다. 시혼은 자신 앞에 놓인 커피잔의 뚜껑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자, 확실히 알고 계시죠. 우리가 겨냥하는 차량은 운전자의 여러 미숙한 행동으로 발생한 사고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차량은 그의 사방에서 정상적으로 운행한 것입니다. 물론 서로의 호흡과 약속, 보조를 생명으로 합니다. 이것을 우리 중에서 발설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렇게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정말로 그런 배신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형사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배신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응징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실존 포기, 이것은 배신자를 사회에서 투명 인간처럼 취급받게끔 존재감을 말살시킨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서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서로가 강제하자는 취지입니다. 오로지 우리의 프로젝트가 영원히 발각되지 않도록, 무결점의 청정, 그 질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서약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운의 장황한 설명은 모두를 압도하게 충분했다. 그러니 모두의 표정이 다부지게 빛났다.
시혼은 다시 한번 종이의 내용을, 짧은 글이지만 또박또박 읽었다. 그러던 중 부각이 한 구절을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저마다 누려온 세계의 현상에서 발생한 적개심을 발산하는 존재들이다. 이 과정에서 확장된 관계를 존중하며, 배신할 시에는 그 존재감이 사회의 전부로부터 말소되는 것에 동의한다.”
그랬다. 이게 서약서의 핵심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누가 이걸 감행할 수 있을까? 타인의 생명 결정권을 누가 쥐겠다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평소 세운의 추진력이나 결기를 봤을 때, 그에게는 안 될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겨졌다.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폭넓은 인맥이 뒷받침되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어쩌면 행정 업무까지 해결해 줄 사람마저도 벌써 확보해 놓았을지 모른다.
“와, 살벌, 아주 살벌하네요. 근데 실존을 없애겠다면, 죽여 버린다는 말이겠죠?”
강변이 눈을 부릅뜨면서 대차게 물었다. 지난번 자신의 발언 때문에 이런 서약서가 만들어진 걸 애써 감추려는 포석이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그런 속내를 감추려는 의도가 볼썽사나워서 시혼은 저절로 실소가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회원들은 여전히 심각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이 마당에 무얼 두려워하는 걸까.
“그게 꼭 살인을 의미한다고 보이진 않거든요. 살아 있어도 존재감이 없도록 한다는 범위까지 포함한다는 게 맞겠죠, 근데 이걸 어떻게 할지?”
부각이 생각을 곱씹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무래도 철학적인 문장과도 같은 심오한 표현에 회원들은 판단이 명료하지 못한 듯 보였다.
“이걸 법원의 판단에 맡기면 아마도 ‘피 한 점 없이 살을 베어라.’라고 했던 것처럼 유명한 판결이 필요하겠는데요.”라면서 곡절은 혼자 웃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운이 시혼을 바라보며 눈짓을 보냈다. 설명을 더 해주라는 신호였다.
시혼은 관계의 단절을 서두로 꺼내며 말을 시작했다. 시작은 휴대전화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부터 모든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차단한다. 그 최종 결과는 사회적으로 방치되는 존재이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말을 마쳤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로부터 완전히 외면되거니와 버려진다는 의미입니다. 알아들으셨는지요?” 세운은 칼이라도 책상에 세워 꽂듯 격렬하게 내뱉었다.
“그게 그럼, 자연인이나 노숙자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나요?” 강변이 아까와는 다른 톤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도는 차라리 낫다고 봐야겠지요. 그 사람들은 어쨌든 관심의 범위에는 있지 않던가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회의 내부에 놓였어도 그 존재가 망각 되게끔 만든다는 겁니다.”
세운의 설명에도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여전히 모르겠다며, 오히려 더 물어보고 싶다는 게 짙어졌다. 안 되겠는지 세운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 여러분. 지금 시점에서 핵심은 실존 포기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무엇이냐, 이게 아닌 겁니다. 그런 사태를 우리가 철저하게 지양하자는 겁니다. 결코 배신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가 견실하게 합심하자는 뜻으로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냉철하게 갈라치는 목소리로 심중을 전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제야 수긍하겠다는 반응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부진 표정이 되었다. ‘참 쉽게 풀어간다.’ 시혼은 세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차마 속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시혼은 테이블에 놓인 ‘실존 포기각서’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종이를 보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서서히 발목을 잡아당기는 거대한 손에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어쩌다가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어느새 이런 끔찍한 서약서까지 만들어내는 집단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단지 몇 번의 모임에 참석한 것뿐이었는데, 그때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왔던 불안과 회의감은 더욱 짙어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버리더니 점점 바스러지는 지경까지 몰린 상태였다. 저마다 웃음과 결속의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에 비해, 시혼은 홀로 고립된 존재가 되어갈 뿐이었다. 그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선 중단도, 탈퇴도, 탈피하려는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세운의 목소리가 시혼의 귀에서 냉정하게 갈라지며 실존 포기가 ‘실제 실행에 이르지 않기를 바라는 경고’라고 강조할 때조차, 그의 마음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고요는 불안이 극도로 차올라 정점을 찍은 순간의, 폭풍 전야 같은 침묵에 눌려있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회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회피했다. 그에게만 얽혀드는 불안이라는 감정의 핏줄들이 더 깊이 묶여가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는 불안을 눌러내는 시도조차 의미가 없는 듯했다. 모든 것이 점점 더 커지고 어둡게 변해가고 있는 지금, 그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절망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시선을 아래로,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