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폭력의 무한 전이
“우리는 모두 하나다.” 강사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강의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결속과 상생을 염원하며 이 말을 쉽게 내뱉곤 한다. 그러나 강사는 이 표현 속에 담긴 의미가 좀 더 다르게 해석되거니와 권력의 언어라는 걸 새삼 되새겨주려 했다.
“하나다”는 단순히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동일한 방향을 향해, 동일한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를 품고 있지 않은가. 전 인류가 하나의 틀 속에서 협력하며 상생을 도모하자는 바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하나가 개별자의 자유를 억누르고,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일까? 무엇보다도 권력에 편재하려는 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전개되지 않던가.
강사는 이런 의문을 학생들에게 던지며 한 가지 생각을 더 풀어나갔다.
“하나다, 이걸 개별자의 하나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모두가 각자 따로따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 아닐까요?”
학생의 얼굴에는 약간의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경쟁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음을, 마치 이 답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학생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강사는 잠시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내포하는 함정을 꺼내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주의 시스템은 개별자들이 자유경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입니다. 이 속에서 성공은 극소수에게 주어지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고유한 가치를 발휘해 발전한다고 믿죠. 그러나 그 가치는 인류와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개별자의 안락과 성공을 위한 것일까요?”
강사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이들이 치열한 경쟁과 자기 계발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 진정한 의미의 하나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까?
강사는 이런 걸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미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보여주듯, 그들은 경쟁 속에서 지쳐 있었다. 자신을 입증해야만 살아남는 사회에서, 과연 공동체의 삶을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개인의 성취를 위해 서로를 적으로 보고 있는지? 그러나 강사는 잠시 망설임을 지우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 하나에 현혹되지 마세요. 진정한 하나라면, 그 속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는 이가 없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계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펴보세요.”
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학생들이 그의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 다수는 이미 경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던가. 말로만 들리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저 희미한 환상으로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나, 그는 말을 덧붙였다. “아시죠, 나치도 ‘하나’를 외친 겁니다.” 학생 중 몇 명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이 말을 듣고 놀란 기색도 있었고, 과장된 비유라고 생각하는 듯한 불편한 반응도 보였다. 전체주의와 공동체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 엿보였다. 어쩌면 이들은 공동체적 삶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강사는 마지막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사회에서 출세하거나 성공을 이룬다고 가정해 봅시다.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 소수일 테고, 그 과정에서 나머지 다수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누구나 성공을 꿈꾸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다수는 결국 소수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죠. 더구나, 고도로 발전하는 기술문명 속에서 우리가 그런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강사는 자신의 질문이 학생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자신도 문제의 답을 찾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 앞에 놓인 현실은 점점 더 치열하고 복잡해질 것이었으며, 그런 세계에서 각자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였다.
강사는 그가 좋아하는 4월의 햇살이 가득한데도, 하나의 주제로 지속되는 수업인지 왠지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학생들이야 더하면 더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 아래에서 유대인은 그들만이 태양이기를 갈망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에서는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요. 짙은 그림자만을 무한히 만들었을 텐데, 그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힘의 우열이 끔찍하게도 명백한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이라는 사태이겠죠. 홀로코스트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걸 배우지 못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테러 집단이라는 선동을 가감 없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로 확실하게 규정해 버렸다는 겁니다. 세계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미국과 맥을 같이 하지요. 그러나 왜 테러리즘이 탄생했는가에 대한 배경은 완벽히 소거시킨 채 말입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나치의 규합을 위해, 유대인 국제적인 조직망이 존재한다며 프로파간다를 설파했죠. 의심의 여지 없이 현혹되도록 만들었답니다. 그럼, 당시 나치의 행위와 지금 이스라엘, 이 둘을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무관할까요.”
권력의 확대되고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신봉이 결합하면 엄청난 파급력으로 상대를 초토화한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있었다. 대중을 우매하게 만드는 과정에 어쩌면 가짜뉴스도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강사는 자신의 논조가 삐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져나갔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그 후에 펼쳐진 일련의 사태는 전쟁이었고 지금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경우, 폭력의 구원자이면서도 폭력의 대리자. 이 관계가 끊임없이 교차 생산되면서 우리의 폭력은 유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폭력의 소멸은 요원하며 부단히 전이하는데, 아비규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수업은 전쟁이나 폭력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고찰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여느 수업과는 다르게 흥미가 만들어지기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왜 이리도 지루하게만 여겨질까. 답답하다는 생각에 시선이 홀연히 허공에 닿았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유대인을 비판하는 게, 자칫하다가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무시하거나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으로 비하되지 않을까요.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셨지만, 자꾸 이런 생각에서 맴도네요.” 그래, 워낙 이런 견해가 난무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난점이 가려져 있었다. 폭력의 전이를 체감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가 그 이후에 유대인이 행하는 모든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작동해서는 안 됩니다. 왜 과거의 폭력에는 슬퍼하고 공감하면서 지금 여기에서는 외면한단 말인가요. 이토록 완고한 유대인의 학살에 우리는 ‘홀로코스트는 인제 그만 우려먹고 너희들도 세계의 안녕과 질서에 복무하라’ 이렇게 주장해야지 않을까요. 우리가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국가 건설 과정에서 펼쳐진 역사의 상흔을 간접으로나마 경험하면서 교훈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질문처럼 던졌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무미건조했다. 미동조차 없었다. 수업에 집중시키기 위한 묘안이 적용되어야겠지만 특이할 게 없었다. 그나마 지진이 관련된 용어를 생각해 보았다.
“만일에 폭력의 발원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전개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표면은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폭력의 진앙을 평정시키기도 버거운 세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진앙을 벌하기에 급급하다면 진원에 대한 분별을 놓치게 될 우려가 큽니다.
진원의 깊이가 깊고 역사가 유구할진대, 진앙만을 죄로써 처벌하면 상대적으로 진원의 해악은 가려질 수도 있단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의 숱한 과오는 출발선부터 이미 비틀어져 있었다는 의심을 던져보게 됩니다.”
강사의 이 내용을 듣고는 학생 두어 명이 진앙이 표면, 진원이 시작점이라며 맞는지 틀리는지 서로 입술 모양으로 주고받았다.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는 모습이 잔잔히 들려오는데 그 사이로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표정이 싱그럽게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전 시간에는 창가에 앉았던 학생이었다.
강사는 잠시 멈칫했다. 왠지 모를 설렘이 움찔하며 가슴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들끓은 자가 폭력을 어김없이 수반하는 것처럼, 애정도 그런 것인지 혼란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수업 시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루어진 수업 내용의 모든 것을 종합하면서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기대에 부응하는 옹골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는요, 기독교는 선량하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