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강사와 시혼, 그리고 세운
그는 점심을 마치고 햇살이 안온하게 뒤덮인 5월의 교정을 홀로 거닐었다. 한참 자라올라온 잔디가 꼿꼿하면서도 푸르고 푸르렀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닥에서 전해지는 푹신푹신한 감촉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여기저기 모여 앉아 활짝 핀 웃음의 꽃을 피워물었다. 저들 얼굴에 조여 오는 햇살이 금방이라도 식어버릴 것 같은, 강 대 강의 대결로 진하게 맞붙었다. 그런데 햇살이 포화처럼 어느 학생에게 유달리 집중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녹색의 원피스 차림에 신발은 붉은 띠가 발등에 그려진 흰색 스니커즈였다.
여러모로 눈에 띄는 모습이 애초부터 잔디였던 여인 같았다. 자연 그대로 살고 있지 않았나 싶을 만큼 정겨워 보였다. 조금은 각진 얼굴이었다. 외모로만 따지면 선호하는 스타일에서는 조금은 거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햇살은 유독 그녀 얼굴에서 연하고도 짙게 펼쳐지다가 가라앉더니, 되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구에게 들킬세라 여학생에게 향하던 무한의 눈빛을 거둬들였다. 그러다 불현듯 소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불과 1세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교정의 잔디밭에는 공인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며 학교 관리인으로부터 제재받은 주인공이 있었다.
여성이었고 교수였다. 그러니까 잔디밭은 남성이나 남성 교수만이 출입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소설 장면이 지금의 모습에 겹치면서 강사는 그 시절의 암울함과 현재의 변화를 실감했다. 배제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지면서, 우리가 정말로 동등하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현재의 모습이 과연 예전 시대의 불평등과 갈등이 현저하게 완화된 결과인지도 견주어 보았다.
하나의 갈등이 무마되면 인접해 있거나 숨어있던 대립이 자연스럽게 솟구치기도 했던 게 역사이지 않았던가. 그는 답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사유를 붙잡고 있었다. 소설 속의 교수는 잔디밭을 황급히 빠져나가야만 했다. 이런 생각을 떨치며 그는 중간고사 전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잔디밭을 벗어나 강의실로 향했다.
겨울바람이 험악하게 부는 날, 현관문이 갑자기 열리는 것처럼 그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이 긴급체포와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하며 집으로 달려들었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순간처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아이가 죽은 사고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숨죽여 지내던 중이었다.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을 때 집행되는 긴급체포였다. 저항은커녕 미란다원칙마저도 고지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구체적인 수사망이 발동되었다는 사실만을 짐작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발설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 한 명이 내 뒷머리를 누르면서 잡아당겼고, 다른 한 명은 등 뒤에서 두 팔을 묶어 걸고, 이러니 몸이 살짝 들리면서 발가락을 세워서 걷게 되었다. 그야말로 끌려가고 있었다. 비굴한 상태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당도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차에서 기다리는 이, 분명 세운이었다. 아니 봉고차 주위로 강변과 곡절, 부각도 보였다. 저들도 같이 잡혀가는 건가. 아니다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지금 나를 끌고 가는 형사들을 지도하는 몸짓이었다. 분명 그랬다. 저들 모두가 형사였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뭔가 확실히 뒤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희들 뭐 하는 놈들이야’라며 외쳤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 묶였는지 모를 포승줄이 단단했다.
최초의 티시포네 회원 모두 열외 없이 모든 조사에 임하고 있었다. 중대범죄 모의와 실행이라는 죄의 올가미에서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나중에 합류했던 신규 회원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들리는 얘기가 없었다. 나는 결국 죄목이 뭐가 되었든 이제는 피의자 신분이 되고 말았다. 변호사를 최우선으로 선임해야 했다.
그리고 단순 가담으로 구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고, 선처를 호소해야만 한다. 악을 쓰며 몸부림쳐봤다. 갑자기 왼쪽 다리가 단단하게 꿈질거리더니 고통의 외마디가 찢어졌다. 이 충격으로 잠에서 깼다. 아, 몹쓸 꿈이었다. 주위를 살피니 어색하게 들어오는 사물들, 싸늘하고 획일적인 철창이 보였다.
어제 들어왔던 구치소였다. 세운을 잠시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살짝 물었다. “누가 고발을 한 건가?” 질문은 짤막했으나 세운은 답이 없었다. 다만 응결되어 내쏘는 눈매가 곱지 않았다. 입가에는 흩어진 미소가 한참 동안 맴돌고 있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큰 소리였다. 맞은편에 앉은 변호사가 깜짝 놀란 표정이더니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멋쩍게 웃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오히려 그를 달래주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실행했던 프로젝트의 준비 과정에서부터 결과까지 소상한 설명을 계속했다. 변호사는 앞에 놓인 노트북에 받아적느라 손가락이 분주했다. 중간에 잠시 말을 끊고는 진술 내용을 수정시켰다. 그러면 세운은 헛웃음을 짓고는 알겠다며 살짝 말하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는 변호사 접견을 마치고 혼자 남게 되자 심란한 마음을 정리해 보려고 지난날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티시포네의 실전이 후대에서 전설이나 신화의 중심에 놓일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물론 어림도 없을 일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도로 위에서 벌인 해악질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하는 거뿐이었다.
어쩌면 분노조절 장애나 행동장애, 일종의 정신병 환자로 취급해서 연구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보복에 보복을 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겠나 싶었다. 분석학자들의 인지 상태로는 이해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극적인 장면을 여러 차례 연출했다.
그런데 이렇게 처참한 결말을 마주하고 있으니, 참담했다. 모든 게 끝났다. 뭐가 잘못된 건지,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데 정말 어리석었던가. 오히려 더 확장하지 못한 게 여한이 되었다. 도덕적으로 질타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끼리는 무결점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우월한 의식으로 실행된 우리의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더욱 억울했다. 점잖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회원들끼리라도 소명의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가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정화 추구,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시포네는 조직이었고 위안이었으며 세상을 정화하는 담금질이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되거나 확인된 난폭 운전자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운영이 비밀 회원제라는 제약도 있었다. 채팅방에서 요청된 건들은 실행하지 못했다.
그들이 올린 영상이 객관적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온라인 회원들을 무턱대고 신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일종의 함정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티시포네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퍼뜨려졌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 그 사명감의 십 분의 일조차 수행하지 못했다. 뼈아픈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제는 고도의 집합을 구성하고 안전한 집행이 요구되었다.
우리의 보복은 되살아나 진리와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끈끈한 동조와 응원을 흡수하여 또다시 진행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희망이다. 티시포네의 조직과 강령은 사멸하지 않았다. 이러니 힘이 솟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에 결집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를 기억하는 개인과 그룹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기대하는 귀환은 싸구려 감상이 아니다. 난폭과 보복이라는 격한 대응은 어느 한쪽이 파멸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소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질긴 생명력이다. 당연히 이대로 멈출 수 없다. 도로에서 난폭함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우리의 행위는 끝없이 소환될 것이다.
그렇게 공유되고 공분의 동조를 형성하며 나날이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웅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된다. 그날은 머지않아, 도로에서 질주하는 만큼 급속도로 다가오고야 말 것이다. 다시 출발이다. 그는 구치소 밖을 나오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견고하게 새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