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다은 Nov 26. 2024

정치 지형도에 새로운 문장을

[의견] 보수와 진보의 재구축이 필요한 시대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것은 오래된 이름, 보수의 이름을 자처했던 이들이 남긴 궤적이다. 그러나 그림자의 끝에는 가치가 아닌, 오직 적대와 보신으로 새겨진 발자국만 남았다. 보수는 본래 전통이라는 깊은 뿌리에서 균형의 가지를 뻗어, 변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공통의 질서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이 땅의 보수라 불린 자들은 뿌리를 썩게 했고, 가지를 말라 죽게 했다. 끝에 남은 것은 부서진 성벽과 희미한 이상뿐이었다.     


보수를 자처했던 이들의 자리는 더 이상 성채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선으로 쌓아 올린 바위 더미, 자기를 살리기 위해 방패 삼아 숨어든 폐허였다. 성채라 불렸던 벽들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했으며, 적대라는 돌무더기를 겹겹이 쌓아 올린 기록이었다.

그러나 오만으로 두터운 성벽은, 결국 무너질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성벽 아래 남겨진 시민들의 기억 속에는 함께 나아가려는 손길 대신, 오로지 외면과 배제의 시선이 흔적으로 남았다.     


시대는 흐르는 강물이었다. 변화는 강을 이루어 쉼 없이 흘렀지만, 그들은 흐름을 거슬러 서 있는 외나무다리였다. 진정한 보수라면 강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섬처럼, 질서를 유지하며 다음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 땅의 보수는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 바윗덩어리가 되어, 물길을 흐리고 멈추게 했다. 강물은 결국 바위를 잠식했다. 바윗덩이는 작아지고 시민의 분노라는 물살은 그 위로 넘쳐 흘렀다.     


그 절정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 속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박근혜의 탄핵은 보수라 칭하던 성벽의 마지막 벽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보수의 유산을 이어받겠다고 했지만, 그 유산은 이미 권력에 대한 집착과 시대를 거스르는 무능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광장의 촛불은 그녀의 그림자만 태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던 구조적 모순까지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지금. 현 정권은 과거의 그림자를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얼룩을 남겼다.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준 무능은 역사를 주체적으로 직시하지 못한 결과였다.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을 역사를 책임질 자리로 내세운 모습은 그들이 과거를 왜곡하는 데만 급급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보수의 이름조차 부끄럽게 만들었다. 썩어가는 과거의 잔재 위에서 보수라 부르기엔, 이들의 손은 너무도 죄악스러웠다.     


이들 보수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이 시대를 읽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변화는 늘 앞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것을 새롭게 조각하는 거대한 파도다. 진정한 보수라면 그 파도 속에서 견고한 섬이 되어야 했다. 변화의 물결을 적으로 삼기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이 땅의 보수는 파도를 가로막으려 했고, 끝내 바다에 휩쓸렸다.     



새로운 보수는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낡은 성벽이 아닌, 시민들의 꿈속에서 자라난다. 지금까지의 보수는 시민들의 삶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탑에 자신을 가두었다. 새로운 보수는 시민의 목소리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권력이라는 목소리로 가려지지 않는, 오롯이 공공선을 위한 언어여야 한다. 새로운 보수는 변화의 파도에 함께 떠 있는 배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는 과거의 유령처럼 떠돌 것인가, 아니면 옷을 갈아입을 것인가. 양쪽은 서로를 적으로 삼는 거울이 아니라, 함께 미래를 바라보는 창문이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는 이념이라는 낡은 틀을 넘어, 실질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협력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그릴 사회는 단순히 낡은 질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균형을 꿈꾸는 조화의 사회다.     


낡은 보수의 종말은 새로운 날의 약속을 알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큰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 정권은 탄핵이든 하야든, 범국민적 저항의 전선에 둘러싸여 있다. 두 번의 보수 정권이 보여준 후안무치는 실수나 실패가 아니라, 시대적 과업의 부재와 권력의 자기 보존에만 매달린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그들의 물러섬을 일차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몰락은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 지형도를 형성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적으로 삼는 구도를 넘어, 시민의 삶을 중심에 둔 양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 새로운 지형은 과거의 잔재를 넘어, 변화 속에서도 균형을 찾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2017년의 탄핵이 권력을 심판하며 남긴 촛불의 여백 위에 우리는 새로운 문장을 써야 한다. 그 문장은 정권의 몰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재확립이 되어야 한다. 함께 조화를 이루며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시대의 선언이 될 것이다. 낡은 질서를 넘어서는 과제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새로운 정치를 설계하거나 논쟁의 자리를 일구어야 한다.     


새로운 날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왔다. 낡은 성벽은 무너졌고 폐허 위로 새벽이 내렸다. 이제는 이 땅의 시민들이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세울 차례다.




<작가의 책-광고>


장편소설 <티시포네 프로젝트>를 Bookk에서 출간했습니다.

작가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