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군함도의 망령, 사도 광산의 재림
어느 날 역사는 다시 사도 광산을 호출했다. 그것은 기억의 연장선에서 우리의 현재를 시험하려는 바람 같은 호출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이 향한 곳은 우리의 자존을 가리키는 깃발이 아니라,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너진 국격의 잔해였다. 사도 광산,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땅속의 금속 광물이 아니라, 우리의 외교적 무력과 의지의 결핍을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
대통령은 마치 술자리의 한턱처럼 역사를 내주었다. 그러나 술잔을 채운 것은 따뜻한 화해의 술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가운 무관심의 물이었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자존을 포기했고, 그 대가로 받은 건 빈 잔뿐이었다. 강제노역의 진실을 새기기로 한 약속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니, 애초에 새겨질 돌이 아니라 먼지 같은 약속이었기에 바람에 날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 광산의 추도식은 거울과 같았다. 그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반쪽만 비쳤다. 일본 정부의 반성 없는 태도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한 냉담한 벽이었다. 그들은 ‘강제노역’이라는 단어를 삭제했고 추도사를 인사말로 교체했으며, 징용 역사를 설명하던 ‘경과보고’마저 지웠다. 추도식이 아니라 조롱의 무대, 반쪽짜리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일본의 비웃음과 우리의 무기력이었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9년 전 군함도에서 이미 경험한 굴욕이 다시 사도 광산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배운 것이 없었다. 저자세 외교는 일본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고, 그들은 약속을 조롱하는 방식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 우리 앞에 내놓았다.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외교의 고장 난 나침반은 일본의 행보를 예측하기는커녕, 방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건 국민이었다. 정부는 국민의 자존심을 방패로 내세워 외교라는 전쟁에 나섰으나, 방패는 이미 구멍투성이였다. 국민은 열받아야 했지만, 너무 자주 열받아 이제는 분노조차 차갑게 식었다. 이 반복되는 모욕 앞에, 우리는 잃어버린 자존을 바람 빠진 풍경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사도 광산 추도식은 연극이었다. 일본은 조롱의 대사를 읊었고 우리는 침묵의 역할을 맡았다. 그 연극에서 우리의 침묵은 항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력한 퇴각이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일본 측 인사가 연극의 배우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가 이미 우리의 자리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대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도 광산은 허무한 외교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헛것들의 행렬을 드러낸 긴 그림자였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 사전 조율조차 못 한 외교부, 그리고 국민이 분노할 힘조차 잃게 하는 무능력. 국격이라는 단어는 이제 교과서의 유물처럼 낡았다. 우리는 그 단어를 외교의 실패라는 고목에 달린 말라버린 잎처럼 바라볼 뿐이다.
역사는 침묵하지 않는다. 언젠가 우리의 자손은 사도 광산을 다시 돌아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묻는 것은 ‘왜 뒤통수를 맞았는가?’가 아닐 것이다. 대신, ‘왜 우리는 우리를 지키지 못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우리의 답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보이는 모습이라면, 그 답변은 이미 부끄러운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사도 광산은 우리에게 오래된 경고를 던졌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지만, 반복되는 것은 고통과 모욕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억한다. 잊지 못할 이름들이 우리 가슴에 각인되었고, 헛것들의 망동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더 이상 바람 빠진 풍경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이제 뚜렷하다. 절대로 조롱받지 않겠다는 결심이 우박처럼 뚝뚝 떨어진다. 저들에게 잔의 반을 채워주는 일 따위는 없다. 우리의 역사는 더 이상 호락호락한 거래의 협상에 올려질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존은 값싼 외교적 포장 속에서 흥정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 광산이라는 이름은 이제 경고가 아니라 선언이다. 우리는 역사의 자리를 다시 차지할 것이며, 우리의 목소리는 침묵을 끝내고 저들에게 똑똑히 전할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의 기억을 훼손하려 든다면, 그 기억은 곧 칼이 되어 당신들을 향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결심은 강철과 같고, 우리의 자존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잊지 않을 것이다. 사도 광산은 우리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굳센 의지와 다짐으로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될 빚진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