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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Nov 30. 2024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사랑하면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닿을 수 없는 지점을 가기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도착할 수 없는 그 행위를 풀어쓴 것이 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왔다. 


어떤 이들의 세상은 단순하지만, 다른 이들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어떤 사건은 일어나고 만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줄곧 오멜라스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슐러 르 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는 이상향의 도시 오멜라스가 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는 행복하다. 단 한 아이를 제외하고. 


이 것은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배경이다. 그 곳에는 지하에 갇힌 아이가 한 명 있다. 그 아이는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외롭고 불행하게 지낸다. 그 아이가 죽으면 다음으로 또 유일하게 불행해질 아이가 있을 것이다. 도시 오멜라스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들의 행복을 조건으로 한 명의 고통받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 우리가 만약 오멜라스에 산다면, 그 사실을 알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동호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인선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동호는, 살 수도 있었다. 비록 정대의 죽음을 알고 있더라도, 광주에서 무참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그것들을 무시하고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동호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살아있다고 한들, 그것은 마땅히 살아갈 만한 삶이된 것인가. 죽음을 애써 모른척 한 채 뒤를 돌아본 이의 삶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일 수 있는가. 동호는 순간적으로 그것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동호는 오멜라스는 떠나는 누군가처럼 자신의 삶을 맞바꾼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다른 죽음을 외면한 후의 삶보다도 낫겠다는 결심하게, 그는 수많은 죽음을 만난다. 그리고 결국 사라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인선은 우연히 제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마주한다. 그것은 비록 수십년 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차가운 땅 밑으로 꺼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직접 겪는 사람 뿐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도 충격을 남긴다. 누군가는 눈물을 감추고, 상처를 감추고 살아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겪은 후 온전히 다른 삶을 살게된다. 그는 흔적없는 가족의 시체를 찾아 생을 헤맨다. 


광주에서 끔찍한 고문을 겪은 은숙의 삶은, 아무리 보통의 삶을 살려고 도망쳐도 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닷가에 쓸려나간 시체들로 더 이상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다고 해서 죽음을 비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이다. 죽음을 마주할 때까지 더해지는 고통이다. 


두 개의 소설은 단순히 소설 속 인물에게 죽음의 여파를 묻고있지 않다. 작가의 눈은 결국 독자를 향한다. 


당신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참사에 가까운 죽음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이야기는 그 어떤 광주와 제주 사건의 소설보다 간접적이다. 끔찍한 단상 위에 얇은 삼베를 걸친 듯, 사건은 그저 타인의 입으로, 기록으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잔인한 묘사 하나 없이,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더욱 그 사건에 귀기울일 수 있다.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친다면 당신은 그 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결국 소설을 읽고 바뀐 사람은 나 자신이다. 캄캄한 아이가 어둠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알고서는 더 이상 같은 삶을 살 수 없게된 오멜라스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을 읽고나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 뿐 아니라 이 책의 독자들은 모두, 이제는 전세계의 누군가도 광주와 제주를 견뎌냈던 그들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다. 그렇게 책을 읽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억울했던 수많은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죽음을 인정하고 겨우, 또 겨우, 힘겹게 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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