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돈키호테>
바야흐로 덕후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사실 덕후는 아주 예전부터 존재했다.
근대 문학의 효시라고 불리우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도 우리는 덕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주인공 돈키호테이다.
사실 돈키호테의 이름은 돈키호테가 아니다.
그의 이름은 이달고. 늙고 병든 노인이다.
그러나 이달고는 중세에 유행한 장르소설인 기사문학에 심취해있다.
아마도 출간된 모든 기사문학을 읽은 그는
이제 단순한 독자의 차원에서 벗어나
기사문학 그 자체가 되기로 한다.
바로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국 그는 이런 책들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매일 밤을 뜬눈으로 꼬박새웠고, 낮 시간은 멍하게 보냈다. 이렇게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그의 뇌는 말라 분별력을 잃고 말았다.(중략) 그것은 명예를 드높이고 아울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편력 기사가 되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은 편력 기사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다. -p69
그렇게 시작된 이달고는 자신의 이름을 기사에 걸맞는
돈키호테로 바꾼다.
돈키호테란, 남자 이름앞에 붙이는 경칭인 '돈'과
허벅지 안쪽 근육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인
'키호테'를 합친 것이다.
이름만 들으면 상남자 중 상남자이겠으나
그의 몰골은 안타깝게도
돌아다니는 것마저 신통할만큼 늙고 병든 할아버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동네에서 종으로 부릴만한 산초까지 대동하고,
자신만큼 비쩍 마른 말에게
로시난테라는
'무엇보다 뛰어난 여윈 말'이라는 최고의 이름을 선사한다.
그리고 나서 떠난 이들의 모험은 알다시피 엉망진창이다.
이름만큼 유명한 풍차와의 전투는 물론,
돈키호테는 일반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멀쩡한 사람에게 먼저 시비를 걸기도 하여
700여 페이지에 걸쳐
수십번 뼈가 부러지고, 몇번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바보같이 느껴지는
돈키호테의 착각이 계속될수록
막무가내인 기사가 되기 위한 그의 무모한 모험은
알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에게는 지금이 어떤 현실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보는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자네 눈에 이발사 대야로 보이는 것이 내 눈에는 맘브리노의 투구로 보이는 걸세.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 정말로 진짜인 맘브리노의 투구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야로 보이게 한 것은 내 편을 들어 준 현자의 드문 가호 덕분인 게야. 투구는 아주 귀한 물건이니 너나없이 모두 그걸 빼앗으려고 나를 추적할 게 아닌가. -p357
뿐만 아니라 줄곧 미쳐있는 듯한 돈키호테의 입에서 종종 비져나오는 어떤 문장들은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가 알아둬야 할 것은, 판사여... 세월과 함께 잊히지 않는 기억은 없고,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는 걸세 -p224
사람은 저마다 자기 행위의 자식이니라. -p93
현대의 덕후들도 돈키호테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덕후가 가진 소비력과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덕후를 비웃고,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럼에도 덕후는 놀랄만큼 진지하고 진한 진심으로 세상을 대한다.
독자에서 시작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가 되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기사문학 속에 영원히 박제된 돈 키호테.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기사로 박제된 자신의 모습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고
책 속에서
영원히 산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