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글쓰기 28] 24.11.05. 붕어빵 오일장 허균 도문대작
비가 몇 번 지나더니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지난여름 그리도 간절하게 기다렸던 겨울인데,
찬바람 앞에서 뜨거웠던 여름날을 그리워했다.
동네 산책길에 겨울 풍경이 생겼다.
붕어빵 포장마차가 한자리 차지했다.
한 마리 칠백 원, 세 마리에 이천 원이다.
팥·커스터드 크림·치즈 붕어빵.
입맛 따라 취향 따라 분위기 따라 맛이 다를 터이니,
세 마리 한 봉지는 담아야 할 듯하다.
초겨울 밤, 뚝 떨어진 기온에 찬바람까지 가세하니
붕어빵 포장마차 앞이 북적거렸다.
붕어빵의 유혹을 인내하며,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을 생각했다.
자칭 미식가라고 자부했던 그다.
유배지에서 먹는 것이 시원찮았다.
옛 맛이 그리웠다.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로 음식평론을 썼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고깃집 앞에서 입맛을 쩍쩍 다신다,는 뜻이다.
최고의 음식으로 ‘방풍죽’을 꼽았다.
주위에 땅 산 사람도 없는데, 배가 아프다.
며칠째, 심심한 쌀죽 한 가지만 먹고 있으니,
허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누구나 붕어빵 추억 하나쯤은 있을 터이다.
내 어릴 적 붕어빵 장수는,
예수님 못지않은 이적을 보여주었다.
닷새 만에 죽고 살기를 반복했다.
항상 장날만 기다렸다.
설탕을 듬뿍 뿌린 붕어빵 때문이다.
장 전날은 잠도 설쳤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항상 같이 가셨는데,
어떻게든 떼어 놓고 가려 하셨고,
나는 어떻게든 따라나서려 했다.
막 구운 맛과 식어버린 맛은 하늘과 땅 차이여서다.
따라나선 날은 횡재였다.
그런 행운은 연례행사와 다름없었다.
동구밖까지 나와 장에서 돌아오실 때만 기다렸다.
장 보따리에 붕어빵이 들어있는 경우는 반반이었다.
못 사 오셨을 때마다,
붕어빵 장수가 죽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한없이 서러웠다.
그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다.
붕어빵을 못 먹는 아픔이 더 커서다.
다음 장날에는 사 오셨다.
죽었다는 붕어빵 장수가 부활한 것인데,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늘나라 주민이 되셨다.
시골 오일장은 사람이 줄어
다리 아래 붕어빵 가게는 오래전 없어졌다.
그분도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했을 터이니,
하늘나라 주민이 되셨을 것이다.
저녁 산책길 붕어빵 포장마차나,
붕어빵 없는 어머니 장 보따리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고소한 내음에 옛일 떠올리며, 쩍쩍, 입맛만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