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겨울 연가” 히트는 한국어 학습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한국어 교실들이 생겨나고 중고교, 대학에서 제2 외국어로 한국어를 채택하는 곳이 늘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양한 한국어 학습서가 줄을 이어 발행되었다. 책거리의 한국어 학습서 코너야말로 문학 다음으로 책의 종수가 풍부한 곳이다.
학습서는 주로 휴대가 간편하도록 B6사이즈가 많다. 이 학습서 코너는 주로 일본의 출판사가 발행한 책들이라 사이즈가 정형으로 책장 높이를 조절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원서들은 같은 장르의 책이어도 저마다 판형들이 달라 책꽂이 높이를 조절하여 책을 꽂게 된다. 특히 그림책들은 어찌나 다양한지 규정 책꽂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책들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학습서인데도 다른 책들보다 키가 훨씬 큰 책이 있어 책꽂이 높이를 조절해야 할 책이 있었다. “新・チャレンジ!韓国語”이다. 김순옥/한도 치즈코 공저의 개구리 두 마리가 표지에 들어있는 책이다. 이 한권만 키가 커서 어쩌나. 아이고 난감하군. 선 채로 책장을 넘겼다. 한국어를 입문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공부를 하게 하는 재미난 책이었다. 김순옥이라는 이름과 첫 만남이었다. 알고 보니 김순옥 선생은 NHK의 라디오와 TV의 한국어 강좌의 강사로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다. 이 책을 책장에 꽂기를 포기하고 표지가 잘 보이도록 북엔드에 세워 놓았다. 이른바 역 발상이다. 한국어 학습자들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일부러 이 책을 추천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김순옥 선생이 책거리에 오셨다. 키가 크고 후레어 스커트를 입고 근사한 베레모를 쓰고 오셨다. 목이 아주 길어 모딜리아니의 그림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이 바로 떠오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선생은 NHK뿐만이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당신 자신이 요코하마에서 コリ文이라는 한국어 교실을 크게 운영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コリ文?!! 고리분이라면 내가 2012년에 한국문학의 재미에 대해 수강생들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김순옥 선생은 그 코리 분의 운영자셨다! 당시 다른 강사분이 나를 섭외하여 이루어진 강연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옥 선생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세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넓지 않다.
선생은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도쿄 거주 수강생을 대상으로 책거리를 렌털 하여 한국어 수업을 열고 싶다고 하셨다. チェッコ り文이라는 이름까지도 준비해 오셨다. 바로 오케이를 하고 싶었지만 기쁜 마음을 누르고 스태프들과 상의하여 빠른 시간 내에 답변을 드리기로 하였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을 들여 검토를 하는 편은 아니다. 주로 직관에 따라 그 자리에서 할지 말지를 정하고, 하기로 결정된 일은 언제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를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해 나가는 편이다. 책거리에서는 연 100회 정도의 이벤트를 개최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 중에 재미난 테마가 있는 사람에게는 꼭 이벤트 요청을 한다. 본인이 한다고 하면 바로 스마트 폰 책거리 달력을 펼쳐 날짜를 잡는다. 한 달 정도의 공지기간을 두고 강연 일을 정한다. 일본 사람들의 경우 처음에는 이러 나에게 많이 놀라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을 시간 들여 생각하고 검토하고 다시 연락을 하여 강연 일과 강연 테마를 잡는 것이야말로 양쪽 모두에게 시간낭비라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시간을 들여 결정해야 할 일과 바로 결정해서 진행하면 되는 일이 있다. 모든 일에 시간을 들일 시간이 없다.
선생의 제안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선생이 인플루언서였기 때문이다. 책거리를 찾는 고객들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고,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한국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2015년 당시) NHK 한국어 강좌에서 가르치고 있는 분이 책거리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선생 덕에 책거리도 널리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와 함께하는 것은 마케팅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 인플루언서인 선생이 비용을 지불하고 우리 책거리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객은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 책거리를 오픈하고나서부터 전국의 한국어교실에 책거리 전단지를 보내면서 수강생들에게 책거리를 안내해주십사는 절절한 손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국어 선생과 함께 오는 수강생들에게는 책거리 오리지널 시오리를 선물하거나 교재로 대량 구입을 하는 분들에게는 할인 서비스도 하였다.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는 분들에게는 더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코리 분의 도쿄 교실로 책거리가 사용된다면 다른 한국어교실 선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책거리에 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버리지 않을까. 책거리 스태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내 마음은 이미 98% チェッコ り文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기울고 있는데....... 그렇지만 점주로서 스태프들의 우려에 대해 납득할 만한 대안을 말해야 한다. 아 정말 복잡하군.
기준을 세운다,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책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을 하는가. 책거리를 열고나서 다른 업체와 함께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순옥 선생의 제안을 통해서 이 문제에 처음으로 시간을 들여 고민을 했다.
결론은 ものこと 에 대해 플러스/마이너스 대조표를 만들어 많은 쪽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순옥 선생이 유명인사인 것이 플러스인 것만이 아니라 책거리가 렌털을 한다는 것도 동시에 알릴 수 있으며 전국의 한국어 학습자들에게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플러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드디어 결론이 났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チェッコ り文 교실을 열기로 한 것이다.
선생은 바로 수강생 모집 전단지를 만들어 오셨고 코리 분의 공식 SNS는 당신의 SNS에서 모집공고를 내셨다. 책거리는 그것을 인용하여 책 코리 분의 시간이 생기는 것에 기쁨을 드러내었다.
チェッコ り文은 생활한국어 학습을 목표로 하여 회화 중심의 학습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정원도 많지 않은 00명으로 수강생끼리의 회화 연습, 역할놀이 등의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다년간 일본어권 학습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온 순옥 선생의 수업 스타일은 독특하였다. 지시나 전달만이 아닌 수강생들의 자주적인 제안으로 토론의 주제가 정해지고 학습 방법이 정해졌다. 당시 책거리 점장이었던 와타나베 나오코 씨와 나는 마지막 문단속을 핑계로 책 코리 분 수업을 공차로 듣는 청강생이기도 하였다.
때때로 수업 중 한국어 네이티브로서 발음을 해 본다던가 수강생들 발표 때 심사위원을 맡는다던가 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チェッコ り文은 이렇게 책거리에서 1기, 2기를 하다가 우리가 책거리 위의 4층을 빌려 편집실로 쓰게 되자 편집실 옆의 회의실에서 수업을 이어가 2019년 6월까지 함께 하였다.
김순옥 선생은, 정작 선생은 모르시지만 나와 책거리 멤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려주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