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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컵플래너 Jul 27. 2020

눈, 코, 입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사과껍질처럼 

술술 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히도

나는 수박껍질이다.


큰 칼 힘껏 쥐고

썰고 박고 내리쳐


속살 쪼개지고 부서져

이리저리 뒹굴고 상처 입어야


겨우 그리고 간신히

벗겨지는 그런 사람.




겹겹이 쌓인 껍데기

걷잡을 수 없어 답답해


훌훌 

벗어제끼고 싶어도


속살이 비명지를까 꾹, 

애써 참았다.




용기와 힘 입어


꽁꽁 싸매던 

껍질, 아니 껍데기에


살살 흠집 

내어 보았다.


생각보다. 건드려도 안아파.



살살 

그리고 슬슬. 


그다음엔

쓱쓱 싹싹 쫙쫙.


이젠 아주 탁탁.



놀랄라

첨엔 조심스럽게.


이젠 대범하게,

두꺼운 껍데기를 파고든다.



언제 균형 잃고 

무너질지 모르는 광산.



광부처럼  


식은땀 줄줄 흐르며 

심장 뛰지만


' 위한 거다, 나를.' 


쉬지 않고 읊조리며

뚫는다.




껍데기는 가라.


칠팔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쌍문동 한 귀퉁이

아기 울음소리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눈, 코, 입


두 손과 두 발

몸뚱이만 남은 내가 


부끄럼 한점 없이 

달빛 앞에 설지니


껍데기는 가라.

쌍문에서 도곡까지


향그러운 가슴, 

눈, 코, 입만 남고.


그,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바리스타.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래머.

드러머. 작가. 마케터.


수원 백 씨 가문의 00대손.

사업가 딸. 집안의 맏이.


이생의 자랑.


정욕. 탐욕. 물질욕. 교만.

시기. 질투. 험담. 조롱. 비판.



모든 껍데기 

낱낱이 벗겨내니


알 몸뚱이만 남았다.


자랑할 것 없는

몸뚱이만 남았다.



나를 나로 

존재케 하고


나답게 하는


몸뚱이만 남았다.



눈, 코, 입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몸뚱이만 남았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는


선악과 따 먹기 전

에덴동산의 하와.


아플 줄 알았겠지만

오히려 자유해진.



95년 6월 17일


쌍문에서 울려 퍼진

어린아기 울음소리를 


지구 생물 중 유일하게,

생생히 기억하는 몸뚱이.



그 몸뚱이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눈을 좌우 돌려 깜빡이고


코를 킁킁대고

입을 뻐끔거린 것이었다. 



다음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달려있음을 깨닫고


꼼지락대며 

희열을 느낀 것이었다.




마이너스 시력을 가졌지만


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두 눈.


커피와 음식 냄새를 유독 좋아하는

민감한 감수성, 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통증을


100가지 언어로 말하는 혀와

혀를 감싸는 입.



작지만 매운 두 손.


뚜벅이 걸음 쉬지 않고

마음먹으면 전국횡단도 하는 두 발.




눈, 코, 입.

두 손과 두 발.


모든 껍데기, 

허물 벗겨지고


가장 나답게 하는 것.



껍데기 벗기다 속살 찢어져도

목에 칼이 와도


목숨 걸고 

지켜야만 하는 것.




목숨 걸고 지켜야만 하는 것

노리는 껍데기들이 


다시 또, 자꾸만 

달라붙는다.


외부 상황이 부추기고

코로나가 부추기고


부추 가득 욱여넣은 듯



목 따끔거리고

눈물 찔끔거리고

얼굴은 빨개진다.




그러나 

또 외친다.


"껍데기는 가라!"



나답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껍데기는 가라!!", 라고



아마도 

아마도


평생의 싸움일 지라.





이겨야 승자,

이기지 못하면 패자라 한다. 


그러나


모든 과정 가운데


한 눈 팔지 않고

최선 다해 싸웠다면


모두가 승자라고

단단히, 외치고 싶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껍데기를.


쫓지 말고

내쫓는 삶으로


승리하는 인생 살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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