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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컵플래너 Dec 31. 2020

율마의 겨울

아픔을 딛고 일어선 율마의 한해

정말, 수고 많았어.


율마에게 율마가 건넨 첫 마디였다.

아무도 봐주지 않고 아무도 몰랐지만, 정말 너무 고생했어.





율마를 처음 만난 건 가을이었다. 그 땐 좀 더 따뜻했을 때였지.


율마는 상처가 많았다. 아픔이 많았다.

그래서 더 꼿꼿하게 서 있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렇게 애쓰며 잘 살아내었다.



때로 율마는 자신이 가진 이파리들을 모두 포기하고 땅 속에 묻혀버리고만 싶었다.

땅 속에 모든 잎들을 묻어버린다면, 율마는 좀 더 편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율마는 자기 자신을, 주위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공기가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의 소리가 틈을 타지 못하게


막고, 막아내고, 또 막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가진 향을 내어주기 싫었고,

굳게 버티고 뿌리내린 자신의 흙이 아닌 다른 이의 흙에 심겨지기 싫었다.





마음은 편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참다가 곪은 이파리가 그만 까만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율마는 자신을 내어주기 싫어, 남은 이파리들과 버텼다. 싸워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율마의 방식이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했다.


율마에게 율마가 찾아왔다.

같은 외형과 이파리와 흙과 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엄연히 다른 율마였다.



다른 율마는, 율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율마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피했지만, 그러다 이파리가 찔리고 너무나 아팠지만

다른 율마는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 난 귀머거리가 되고 싶어. 네 얘기 따윈 듣지 않을래.'


수 년만에 입을 뗀 율마의 첫 마디였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율마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율마는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는 율마의 말에 충격을 받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율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율마가 조금 진정이 되자, 다른 율마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율마는 이제 그만 지쳐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폭풍과 번개가 있었지만 다른 율마는 떠나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율마는 다른 율마에게 말했다.

" 나 추워 "


다른 율마는 자신의 이파리로 율마를 흠뻑 안았다.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저 힘껏 꽉 끌어안았다.



율마는 처음 느꼈다. '온기'라는 것을.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 바로 그 순간.

눈물이 말라붙었다고 생각한 이파리에서 눈물 같은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비보다 축복이었고, 선물이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율마는 여전히 별 말이 없었지만

다른 율마는 여전히 율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삶 처음으로, 율마에게 '믿음'이 생겼다.


믿음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헛소문이고 가짜라고,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율마에게

다른 율마는 한 줄기 빛이었고 믿음이 되었다.



두렵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같은 믿음이지만

그것나마 있다는 것이 율마에게는 호흡을 하며 살아가고 태양빛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나는 율마다.



십 수년을 다른 율마를 만나지 못하고,

벌이나 잠자리 따위만 만났던 율마곁에



그나마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율마'들이 생긴 한 해였다.



이제는 그 '다른 율마'들이 언제 떠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그저 내 이파리를 잘 가꾸는데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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