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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Apr 04. 2020

상사가 싫어지는 객관적인 이유

미매뉴얼 이야기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 차와 상대방 차가 부딪혔는데 도로 모양새로 인해 서로 사고를 예상하기가 힘들던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었죠. 


참 신기했던 것은 사고를 당하는 그 찰나가 완전히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아..사고가 나는구나.', '내일 할 일도 많은데..', '가족들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등등 많은 생각을 불과 1~2초 사이에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사고 자체에 대해 그리 큰 감정은 없다는 것이었죠. 물론 사고가 난 후의 뒷수습에 대해서는 지금도 짜증이 납니다. 차가 박살난건 물론, 병원 신세를 지면서 겪었던 괴로움과 제가 갖고 있던 이런저런 계획이 꼬여버렸으니 감정이 섞일 수 밖에 없죠. 운이 좋아서 생각보다는 많이 다치지 않았음에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그 순간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다못해 '저 자식은 운전을 왜 그따위로 해서는 미친 X'같은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말이죠. 그냥 그저 객관적인 사고 자체만 팩트로 존재할 뿐, 나도 예상할 수 없었던 말 그대로 '사고'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성향 자체도 내가 예상할 수 없고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별 감정을 섞지 않는 편이기도 하구요. 


아니 상사가 싫은 객관적 이유라면서 갑자기 교통사고 이야기를 왜 하냐구요?




'상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인물들이 아닙니다. 


나의 월급과 승진을 통제하고 내 사회적 삶을 규율하는 사람들이라 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평소에 보이는 모습 또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다거나, 성질을 버럭 낸다거나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합니다. 이것만 하면 다행이게요? 월급은 나보다 배는 더 받아가면서 빈둥거리는 것을 보면 더욱 얄밉고 싫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거 하나만 생각해봅시다. 아래 두 문장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이 되시나요?


A. 저 인간의 행동은 사람을 정말 곤란하게 만드니까 문제가 있다.

B. 저 인간의 행동은 사람을 정말 곤란하게 만드는 것으로 느껴진다.



문장 A에는 내 감정이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곤란하게 만드니까'),객관적인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확인해봐도 문제라고 느낄 여지가 있고, 심지어는 그런 행동을 하는 상사 스스로도 그것이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의미의 객관적 기준은 인간관계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집단 또는 그 집단을 포함하는 모집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규범의 선이 있고, 그 선을 심하게 넘어가서 아웃라이어가 된다면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는거죠.) 


하지만 B 에서의 주체는 그의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감정입니다. (저 문장의 주어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내가’ 입니다.) 


근대 이래로 사람은 객관적인 정보를 받아들인 후, 이를 기반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 결과를 보면 인간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정보와 의식 사이의 흐름에 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객관적 실체 → 이성적 판단 → 감정'의 순서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다음과 같은 흐름이 뇌의 구조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객관적 실체 → 감정 → (내 감정에 대한) 합리화


한 마디로 우리는 팩트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먼저 느낀 후 이성을 활용해 합리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사와의 문제에는 이렇게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상사의 말/행동 → 이성적 판단 : '~한 뜻으로 저런 말은 한 것 같은데, ~한 점에서 문제가 있는 발언이며, 향후 문제가 될 수 있음' → 짜증이 남]이 아니라


[상사의 말/행동 → 짜증이 남 → 합리화 : '상사라는 사람이 생각없이 문제가 될 수 있는 말을 하다니..']이 실제 우리가 느끼는 메커니즘입니다. 


이런 흐름이 반복되거나, 혹은 정서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는데 취약한 사람들은 감정이 곧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상사의 말/행동이 ~한 점에서 문제가 있고, 그래서 내가 짜증이 났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또 사람 돌게 만들더라. 뭐라고 했냐면 말이지..'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뭐라고 했냐면 말이지' 뒤에 나오는 설명은 실제로 상사가 했던 말이나 표정, 행동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감정이 곧 사건이 되어버리는 경우에는 팩트보다는 감정이라는 필터를 통한 주관적 기억이 더 중요해지니까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와 씨 솥뚜껑이 나를 놀래켜서는 말이지..'가 되어버립니다. 솥뚜껑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일이죠.


시간이 지나면 팩트는 잊혀지지만 감정은 그대로 남습니다. 객관적인 정보보다 더욱 강렬하게 기억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감정만 하나하나 쌓이다보면 내 주변에는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일만 가득하게 되고, 그 속에서 나는 피해자가 됩니다. 모든 상사는 싸이코가 되는거죠. 감정이 곧 사건이고 기억이니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죠. 


교통사고의 뒷감당은 저를 매우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저 자신이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으며, 폐차하고 보험사와 실랑이 하고, 그동안 꼬여버린 업무와 일정을 정상화시키느라 퇴원 후에도 고생을 해야 했죠. 감정적으로도 매우 소진되는 시기였고 지금도 그 당시에 대한 기억은 썩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사고 자체에 관한 팩트와 제가 가지고 있던 객관적인 인식이었습니다. 무슨 모양의 도로에서 얼마 정도의 속도로 가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 내가 핸들을 어디로 꺾었는지,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고, 나의 대처가 미흡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말이죠.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나중에 사고를 감식한 경찰과 보험사의 설명을 들으며 내 인식과 비교해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죠.)


이처럼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괴롭고 번거로운 일 속에서 내 감정이 녹아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면 그 뒤에는 잘못에 대한 감당이니 못견딜 정도까지 짜증나지는 않으니까요. 


상사는 기본적으로 싫고 짜증나는 사람 맞습니다. 권력관계라는게 엮이는데 순전히 좋은 관계이기는 어렵죠. 하지만 그에게 짜증을 느끼는 내 감정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문제인지 아니면 내 감정이 문제인지요. 


그래서 무엇보다 ‘감정이 곧 사건이고 기억’이 되는 사태는 막아야 합니다. 감정이 사건이 되면 나는 계속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객관적 실체를 들여다볼 기회를 놓치게 되며, 상사에게 자꾸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어서 관계를 개선하거나 나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상대 입장에서는 정말 '싸우자' 처럼 들리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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