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헛소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젊은 직장인들에게 워라밸이라는 키워드는 좀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단어다.
사람의 역량이나 전문성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직위가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나이가 50이 되도 신입사원 수준의 일만 한다면 차고 넘치는 역량을 가지게 되겠지만, 일반 직원과 관리자와 경영진의 고민이 다를 수밖에 없고, 때문에 단순히 시간과 경험이 역량과 전문성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월급 루팡하는 관리자들을 수도 없이 봤을테고, 특히 아래 직급일 때 일 잘했다고 관리자되었는데, 관리자로서는 전혀 자각도 능력도 전문성도 없는 사람들을 차고 넘치게 목격했을 것이다. 모두 시간, 경험, 자리가 역량과 전문성을 키워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두뇌에서 개인의 커리어 역량 성장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것이 하나 있다. 일단 사람의 두뇌는 일반 신체처럼 기본적으로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바뀌지 않는다. 운동 빡시게 며칠 하면 근육 금방 불어나나는 것 같지만 일주일만 쉬면 바로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두뇌의 역량도 똑같다. 시험 공부할 때 며칠 바싹 공부해봐야 끝나면 원래의 역량이 된다. 항상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 능력이나 정보 처리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발등에 불 떨어지는 것 같은 압력 속에서 두뇌 불나는 것처럼 일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에 대해 정리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등의 과정이 매우 높은 강도로, 상당 기간 지속되어야 한다. 매일 매일 근육 터져나가라고 운동하고 매일 강도를 높이고, 근육 파열이 되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과정을 상당 기간 지속해야 운동 선수의 몸을 가지게 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2002년 월드컵 팀을 준비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우리 선수들을 준비시키면서 사용했던 체력 촉진 방법과 똑같은 방법을 두뇌에도 쓰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최상위권 학부에 가보면 숙제가 상상을 초월한다. 매주 읽고 토론하고 정리하고 발표해야할 숙제가 끝도 없이 밀려온다. "사람 입에 소화전 호스를 연결하고 물틀기"라고 이야기하는 그 방식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의대생들이 한 학기에 수천페이지 분량의 파워포인트를 공부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을 애초에 버텨낼 지능이 안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면이 많다면 이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릇을 키우자는 것이지 한꺼번에 감당할 수 없는 량을 쏟아넣어서 그릇을 깨뜨리자는 목적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정서적으로 이렇게까지 불안정하지만 않다면 직장인으로서의 역량 성장 역시 동일한 방식의 훈련이 필요하다. 프로젝트에 매달려 미친듯이 그 일 자체에 모든 것을 걸고 내 두뇌의 한계치를 넘어가는 경험을 몇 달간 지속하는 것.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개인의 사고 역량 및 전문성은 삽시간에 다음 레벨로 성장한다. 클라스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를 '몰입 (Flow)' 라고 부른다.
재밌는 건 이 역량 성장의 과정 (정확히는 두뇌의 뉴런간의 연결이 재형성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강요'로 인식하거나, 그 몰입의 결과물만 떠올리면서 일을 하려는 순간 우리 두뇌는 역량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저 미친 상사놈이 오늘도 우리 쓸데없는 일로 야근시키네' 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오래해봐야 역량 성장은 물건너간다는 뜻이고, '이 일 성공하면 보너스 나오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일해도 역시 기대하는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록 강요로 시작한 일이거나, 죽도록 하기 싫지만 탈락하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건, 일을 시작하면 '나의 순수한 의지로, 정말 일의 결과 그 자체가 궁금하고, 기왕 시작한 일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역량 성장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나이먹은 꼰대들이 맨날 야근해도 역량이 도무지 늘지 않는 이유)
같이 서울대 공대를 입학했다고 해도 수학 자체가 재밌어서 수학을 공부했던 학생과 대학교 가려고 어거지로 고등학생 시절을 버틴 학생이 대학교에 와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게 된다. 어느 정도의 자발성과 보상과 상관없이 몰입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자기를 한계에 몰아넣어야 역량 성장이 생긴다. 마라토너의 러너스 하이와 똑같은 메카니즘이다. 사실 유사한 신경전달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작용이니까.
이러한 역량 성장 과정을 무한대로 지속할 수는 없다. 두뇌에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고, 급격한 성장을 경험한 두뇌에 휴식이 주어져야 실제 그 역량이 완전히 내재화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워라밸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에 주로 회자되는 워라밸의 개념은 그냥 '8시간 일하고 그 이상은 일 시키지 마세요' 라는 취지로 이야기된다. 물론 계약의 관점에서 보면 8시간어치 돈 받았으면 그만큼 해주는게 맞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어디까지나 나의 육체적 노동 투입과 그 대가라는 측면에서만 맞는 사고이고, 나의 역량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시각이다. 왜냐면 내 두뇌에 압박도 느껴지지 않고, 내가 몰입하기도 쉽지 않으며, 내가 몰입해서 일을 하려는 순간 내 머리속 한켠에 '내가 왜 돈도 짜게 주는 이 회사에서 이렇게 일을 하려고 하지? 미쳤나?' 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들어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을 느슨하게 하고도 결과는 좋을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의 성장과 전문성은 몰입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흔하게 내뱉는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내 역량의 폭풍 성장 후 안정을 위한 휴식의 기간을 상징하는지, 아니면 지금 일하는 상황과 환경에 대한 내 개인적인 혐오와 강요된 노동을 상징하는지 스스로 가끔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후자가 되는 순간 나는 남들이 욕하는 월급 루팡이 되고, 나이들어가면서 무능한 관리자로 변신하게 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하루에 투입해야 몰입이 일어날까 궁금할텐데, 개인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통상적으로 '유튜브보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머리가 아프니 TV 예능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을 퇴근 하면서 할 수 있다면 아직 충분히 일에 몰입을 안한 상태다. 진짜 두뇌로 몰입을 하게 되면 끝나고 나면 하루 종일 등산한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의욕도, 힘도 없어진다. 그냥 눈 앞에 있는 음식 집어 먹고, 힘든 몸으로 샤워한 뒤에 침대에 눕고만 싶어지는게 표준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로 일주일 6일, 2~4개월 정도가 한 싸이클일 듯 싶다. 괜히 미국 대학들이 쿼터제로 8주씩 애들에게 숙제 폭탄을 떨구는게 아니다. 지금 내 일에서 성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일단 이렇게 해보자.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안하지만 이 일은 내가 애초부터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즉 그저 시간 때우는 일이고, 로봇이나 프로그램이 조만간 대체할 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회사나 상사가 미워서 안하는 거라면 딱 두달만 이렇게 일하고 사표 던지자. 진짜 여러분이 몰입 두달 한다면 몰입이 주는 충만함으로 사표 던져도 마음 편하게 다음을 계획할 수 있고,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여러분을 붙잡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