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으며 깜짝 놀라곤 한다. 아니, 활자가 원래 이렇게 작았었나? 너무 작아서 읽을 수가 없잖아! 출판사에 항의 전화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이렇게 화가 난 건 초보 운전 시절 ‘도로에 차선을 누가 이렇게 좁게 그려놓은 거냐’며 성냈던 이후로 처음인 듯싶다.
워드 파일을 사용할 때 11포인트는 너무 게을러 보여서 10포인트를 고집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2포인트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가벼워서 좋다며 내 사랑을 듬뿍 받던 노트북은 작아서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뭐 토이스토리의 우디도 아니고. 하여간 앞으로 13인치 노트북을 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30대에는 40대가 되면 중년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40대가 되니 50대가 중년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제발 노안이 오면 중년이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아 주시길) 이쯤에서 당당히 12포인트 궁서체로 써본다.
X세대를 규정하는 여러 정의가 있다.
4050, 낀세대,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지켜보았고 대한민국 고속 성장의 혜택을 누린 세대,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은 중년층, 하지만 조만간 퇴사를 걱정해야 하는 세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X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가는 세상을 직접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다.
학교 앞 서점에 ‘아무개야, 모모 주점으로 와라’처럼 메모를 남겨서 서로 소통하기도 했지만 삐삐 세대이기도 해서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디지털 숫자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시티폰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이후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보다 컸다.
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컴퓨터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으신 건지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생(아니 국민학생)인 나를 컴퓨터 학원에 보냈는데 그때 배운 것이 GW-BASIC, COBOL이었다. COBOL은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선생님한테 질문을 했는데 ‘경찰서에서 많이 쓴다’라고 알려주셨고, 그럼 나는 커서 경찰이 되어야 하는 건가?라는 고민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 그 선생님은 상상이나 했을까? 거의 전국민이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손가락 하나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는 날이 올 줄?
처음 입사했을 때 내 직무는 법무였다. 당시엔 나름 희귀종에 속하는 '법대 나온 여자'였지만 우리 과장님은 내가 무려(?) 파워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초특급 인재라는 점을 더 반가워했다. 가끔은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선배들에게 디지털 세상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선생님 역할도 했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 이렇게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스마트폰까지는 잘 적응했는데, 제4차 산업혁명은 왜 하필 내가 중년이 된 이 시점에서 찾아온 것이냐는 말이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메타버스 세상과 블록체인 기술을 배워놓지 않으면 나 도태되는 건가? 키오스크를 불편해하는 현재 어른들처럼 되는 건가?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최근 변화의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 난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은데 언제까지 새로운 것을 계속 공부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X세대 아닌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제3차 산업혁명도 가뿐히 넘긴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무섭지만 안 무서운척하면서) 다짐해본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기로, 그렇게 호기심 많은 중년으로 살아가기로. 내가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해도 천천히 변할 세상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한편 나에게는 더 큰 계획도 있다. 40대에는 올여름에는 꼭 비키니를 입을 거라는 목표 세우기(입기 아님)를 놓지 않고, 50대에는 역전의 용사들 다시 만나서 스타크래프트도 한판 땡기고, 60대에는 산속에 콕 처박혀서 자연인으로도 살아보다가 70대에는 신예 먹방 유튜버(아님 틱톡커 아님 인스타 인플루언서 아님 하여간 당시에 뭐가 있든지 간에)로 다시 화려하게 등장할 예정이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나는 언제나 X세대니까.
※ 사실 X세대라는 표현은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세대’라는 정의에서 나왔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중년의 메타버스 체험기]
얼마 전에 메타버스 세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서 제페토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아바타라는 녀석이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구석에 가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것이었다. 뭐가 뭔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왜 울고 있어요?’라며 나를 토닥토닥 위로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나 지금 왜 마음이 따듯해지지? 왜 진짜로 눈물이 나려고 하지? 쟤는 누구지? 나는 누구지?
그 아바타님이 혹시 초등학생이었으면, 이 자리를 빌려 님은 커서 공감능력이 뛰어난 정말 좋은 어른이 될 거라는 덕담과 더불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요, 혹시라도 저와 같은 X세대였으면, 이 자리를 빌려 정말 반가웠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